<에피소드 6-대를 잇는 자(1)>
<에피소드 6-대를 잇는 자>
봄은 아주 알차게 무르익었다. 어느새 한낮엔 덥다는 말도 나올 만큼 따뜻해졌다. 마당 구석에 커다란 나무는 하얀 꽃이 무성하게 피었다. 벌들이 미친 듯이 몰려올 만큼 향기가 좋았다. 이 나무가 그 유명한 보리수나무라고 했다. 가을에 빨간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로 효소를 담으면 천식이 감쪽같이 치료된다며 은미 씨가 자랑했다.
나무가 크기는 엄청 큰데, 옆으로 컸다. 기둥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잔가지들이 무성하게 뻗어 울창할 정도였다. 올 겨울에는 가지를 쳐야 할 것 같다며 은미 씨가 아련한 눈으로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것도 내 일이겠지. 그때까지 안 잘린다면. 가지를 치긴 쳐야 할 것 같다. 마당 귀퉁이에 있으면서도 꽤 넓게 그늘을 만들었다.
울타리가 쳐진 보리수나무 옆 그늘 아래에 테이블 두 세트가 더 놓였다. 손님이 꽤 많아진 탓이었다. 마당에 놓인 테이블이 다섯 개, 대청에는 상 두 개. 총 일곱 테이블이 됐다. 평일 퇴근 시간이나 주말 오후에는 전통차를 마시러 오는 손님들이 꽤 늘었다. 동네에서 도둑으로 오해받았던 일전의 그 사건 덕분이기도 했다.
그 날의 사건 이후로 나는 꽤 유명해졌다. 옆 골목 마트 사장님도 나를 알아보았다. 개량한복을 입고 다니니 더 튀겠지. 골목 끝 커피숍의 아르바이트생들과도 친해졌고, 옆집 아주머니는 매일 출근하다시피 들러 종류별 차를 매일매일 한 가지씩 맛보고 있다. 근처 빵집, 과일가게, 서점, 커피숍, 한복집, 인테리어 사무실, 옷가게, 액세서리 가게, 휴대폰 매장까지. 호은당 주변 일대에서 나는 꽤, 아니 아주 많이 유명해졌다. 젠장. 쪽팔려. 하지만 매출은 오르고 있으니 나쁘게만 볼 수는 없었다. 확실히 손님이 많이 늘었다.
“오! 그러고 보니 오늘 오빠 월급날이지?”
내 월급날을 네가 어떻게 아는 거냐. 한 달 가까이 지내다 보니 연화 선녀와도 꽤 친해졌다. 연화 선녀는 우롱차를 호로록 마시며 다리를 척 꼬았다. 야. 내가 무릎담요 준 건 또 왜 바닥에 있는 건데. 네가 빨래할 거냐고! 건너편 테이블에 있던 젊은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자 친구로 보이는 일행이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내 월급날은 너랑 상관없다. 담요 바닥에 던져놓지 말라고! 안 쓸 거면 그냥 주던가.”
“아냐. 잔디가 춥다고 해서 덮어 준 건데.”
그래. 어련하시겠어. 어느 날은 개미가 춥대, 또 어떤 날은 지렁이가 춥대. 그래. 만물이 너한테 담요 달라고 조르지. 나는 툴툴거리며 담요를 주워 털었다. 풀잎 부스러기가 폴폴 날렸다. 세탁물 바구니에 담요를 넣고 나오는데, 상담실의 문이 열리고 나이 지긋한 노부부가 웃으며 나왔다. 은미 씨도 방긋방긋 웃으며 따라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예의 누르스름한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봉투를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복용법은 정리해서 같이 넣어 두었습니다. 아시지요? 약주는 절대 안 됩니다.”
“예, 선생님.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부부는 싱글싱글 웃으며 인사하고 대청을 내려왔다. 나 역시 웃는 얼굴로 그들이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가는 동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 소사님. 유자차가 아주 맛이 좋았습니다. 다음에는 차 마시러 들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살펴 가십시오.”
나는 소사로 굳었다. 뭐, 박 군아! 하는 것보다는 낫다. 내 나이가 있는데 박 군은 무슨. 노부부가 약방을 나가고 은미 씨는 연화 선녀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소사 오빠! 나 와플 만들어 줘!”
아니, 저게. 야, 내가 니 하인이냐? 확 그냥 한 대 쥐어박을까보다. 주먹이 부르르 떨렸지만, 꿀밤이라도 한 대 놨다가 선녀인지 뭔지 하는 신에게 벌이라도 받을 까 봐 무서웠다. 으으. 얄미운 녀석. 은미 씨는 손목시계를 힐긋 들여다보더니 빙긋 웃었다. 그래. 배고프다 이거지? 간식 시간이 되긴 했다만... 주는 건 문제없는데...
“와플? 메뉴판에 없었잖아요, 형!”
“그게... 약사님이 간식으로 드신다고 그냥 대충 만드는 거라서...”
“박 소사! 우리도 그 와플인가 하는 거 주는가? 일전에 먹는 거 보니 참 예쁘장하던데.”
니들이 그런 소리 하면 쟤들도 달라고 하잖아! 하필이면 있는 손님들이 다 단골이야. 어흑. 나는 이 두 식충이들과 대청의 어르신들, 단골 회사원들, 오늘 처음 온 젊은 커플의 몫까지 열심히 구워야 했다. 그래. 어쩌겠어. 내 일이 그건데. 나는 꿍얼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빠! 알지? 나는 바나나 많이!”
“형님! 저희는 생크림 많이요!”
저것들이...! 나는 후다닥 달려 나가서 주방 문 앞에 섰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들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토해냈다.
“맛있게 해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흑. 소사는 무슨. 여전히 나는 노비였고 무수리였고 나인이었다. 하인도 아니었다. 그냥 잡일꾼일 뿐이다. 나는 와플 기계를 산 엊그제 이후로 줄곧 냉장고에 상시 대기 중이던 반죽을 꺼내고 와플 기계를 예열했다. 그 사이 바나나와 망고도 썰고 과일 잼도 이것저것 꺼내 두었다.
과일은 계절 상관없이 틈만 나면 선물이 들어왔다.
엊그제는 어느 그룹의 둘째 며느리라는 사람이 엄청나게 화려한 열대과일 바구니와 꽃다발을 보내왔고, 지난주에는 어느 회사의 부장 부인이라는 사람이 수박 다섯 통이 든 박스를 보내왔다. 덕분에 지난주부터 쭈욱 수박이 간식이었다. 은미 씨는 수박은 봄에 먹기엔 차갑다느니, 제 맛이 아니라느니 구시렁거렸지만, 결론은 질린다는 소리였다.
나는 수박화채, 수박 주스, 수박 아이스크림, 수박 스테이크까지 만들었지만 여전히 수박 한 통이 그대로 있다. 손님들도 수박은 제발 그만 달라고 할 정도였다. 수박에 질린 은미 씨가 충동적으로 지른 와플 기계로 수박 와플을 만들었다가 연화 선녀가 저주를 내릴 뻔했다.
남는 수박은 서로 미루고 미루다 결국 내 차지가 됐다. 나도 질려서 미칠 지경인데 어쩌라고! 오늘 퇴근길에 들고 가서 주인집 드시라고 줘야겠다. 이제 수박의 얼룩무늬만 봐도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와플이 달달한 냄새를 풍기며 구워졌다. 나는 나름 예쁘게 꾸며 제일 먼저 대청의 어르신들에게 갖다 드렸다. 어르신들은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찰칵찰칵 찍고 나서야 드시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 킬킬 웃고 말았다.
“박 소사, 나 요즘 인싸그램 하는데 자네도 하는가? 아이디 가르쳐줄까? 맞팔하세.”
“어르신, 완전 신세대시네요! 이따가 가르쳐주십시오. 저도 인싸그램 하거든요.”
나는 다음 와플을 만들어 은미 씨와 연화 선녀에게 가져다주었다. 손님들부터 주려고 했지만 은미 씨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당장 간식을 주지 않으면 곧 손톱 대신 내 목을 뜯겠지. 얼른 간식을 주고 다음 와플을 직장인 단골들에게, 마지막 와플은 젊은 커플에게 주었다. 젊은 커플은 우리도 주시는 거예요? 하며 손뼉까지 치면서 기뻐했다. 여기저기에서 찰칵찰칵 소리가 들렸다. 음. 뿌듯하네.
사실 인싸그램에 호은당을 태그로 달아서 올라오는 간식들 사진이 많다. 시작은 내가 했지만 연화 선녀도 합류했고, 요즘은 손님들도 인싸그램에 사진을 올려준 덕분에 일반 손님들도 제법 많이 왔다.
“정우 씨, 안 드세요?”
“어우, 굽다 보니 단 내에 질렸어요. 5분 동안 나 찾지 마요.”
나는 입가에 생크림을 묻히고 맛깔나게도 먹는 은미 씨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단 내가 주방에 진동을 했다. 나는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들고 사랑채 뒤로 도망쳤다. 옷에 달달한 냄새가 진하게 베였다. 낡은 의자에 풀썩 앉아 나만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아. 맞다.”
담배 다 떨어졌는데. 사 온다는 걸 깜빡했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귀찮은데. 그래도 없으면 안 되니까. 나는 비실비실 대문을 나섰다.
“오빠! 올 때 메로나!”
확, 씨. 메로나로 팰까 보다. 나는 대꾸도 않고 잽싸게 도망쳤다. 뒤에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터덜터덜 골목을 나가서 편의점까지 가는 3분, 나는 인사를 다섯 번이나 했다. 동네 유명인사가 따로 없다.
담배를 사고 나온 나는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래. 여기서 쉬다 가지 뭐. 가서 노비 짓 하느니.
날씨 좋다. 하늘도 화창하고. 요즘 미세먼지 없는 날이 종종 있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