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7-운수 좋은 날(2)>
저녁 무렵, 연화는 양 손 가득 먹을거리를 잔뜩 사들고 요란하게 쳐들어왔다. 콧대를 높이 세우고 기세 등등하게 들어온 그녀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오빠! 내가 오빠 생명의 은인이다! 알지?”
예, 예. 어련하시려고요. 연화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우리는 이야기했었다. 분명히 연화가 생색이란 생색은 엄청나게 낼 거라고. 명품 사달라고는 안 하겠지만 당분간 식사는 죄다 연화 위주로 준비해야 할 거라고. 그리고 우리 둘이 똑같이 예견한 대로, 연화는 내일부터 일주일치 식단을 직접 짜 왔다.
“야, 아무리 그래도 피자는... 반죽까지 내가 어떻게 하냐. 내가 무슨 요리사야? 그리고 여긴 약방이고 찻집인데 그런 냄새 풍겨가면서 어떻게 장사를 해?”
나는 무려 스물다섯 개의 메뉴가 적힌 노란 부적 종이를 팔락 팔락 흔들며 반대했다. 점심, 간식, 저녁이라고 친절하게 표까지 그려놓았다. 파스타, 양장피, 손만두... 그래. 그건 다 이해하겠는데, 피자는 좀 아니잖아. 안 그래도 냄새 많이 나는데. 우리 밥 준비할 때마다 손님들한테 얼마나 눈치 보이는데. 거기다 만들 때마다 손님들 몫까지 해야 하니 양도 어마어마하게 해야 하고. 수제 피자라니. 날 죽여라.
“여기 약방이야? 내 밥집인데. 언제부터 약방이었어?”
“김수진. 너 죽는다.”
은미 씨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피자에 줄을 죽죽 그었다. 김치전. 서양식 전 대신 한국식 전으로 가자. 연화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생명의 은인에게 그따위 대접이냐고 날뛰었지만 나는 들은 척도 않고 메뉴들을 지웠다. 김치전이 왜? 김치 없으면 젓가락도 안 드는 녀석이. 어휴. 수타 짜장, 시폰 케이크... 미친. 도대체 날 뭘로 본 거야?
결국 메뉴들은 파전, 잔치국수, 샌드위치 등등으로 변경됐고, 연화는 잔뜩 삐져 사 온 음식들 혼자 다 먹을 거라고 난동을 피우다 은미 씨에게 제압됐다.
“아무리 그래도 여긴 식당이 아니잖아. 적당히 해.”
은미 씨는 내가 고친 메뉴들을 죽 훑어보다 볼펜을 받아 갔다. 지워두었던 해물 짬뽕이라는 글 아래, 내가 적어 둔 비빔국수 위에 줄을 죽죽 그어 지웠다. 그리고 조용히 적은 것은 전복 삼계탕이었다. 에라. 이 사기꾼들.
그리고 그날 밤, 은미 씨는 친절히도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피곤하고 많이 놀랐을 텐데, 푹 쉬라는 말을 남기고 은미 씨는 돌아갔다. 낡고 허름한 옥탑방이지만 이 한 몸 뉠 곳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대충 씻고 누운 나는 너무 놀란 탓에 쉽게 잘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몸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머리를 대기 무섭게 나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괴상한 꿈을 꾸었다.
원래 나는 꿈을 잘 꾸지 않는다. 꿈을 꾸려면 로또 번호 정도는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꿈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꿈을 꿔도 관심이 없으니, 내 머리는 아예 기억조차 하지 않는 거겠지.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내가 화들짝 놀라 눈을 뜬 시간은 새벽 두 시였다. 정확히 두 시. 휴대폰 액정에 2와 0 두 개가 있었다.
너무나 선명한 그 꿈은, 그냥 꿈인가 하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무시무시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베개며 이불이며 흥건했다.
잠이 싹 달아났다. 땀을 그렇게 흘렸는데도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당장이라도 연화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 새벽에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허름한 매트리스 위에서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던 나는 결국 휴대폰과 담배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담배에 불을 착 붙이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아, 씨. 깜짝이야. 이 시간에 어떤 미친... 연화?
“연화야! 나 있잖아!”
나는 방금 꾼 꿈을 이야기하려고 말을 꺼냈지만, 연화는 내 말을 듣지도 않았다.
-나가! 빨리 나가! 나가아악!!
얘 또 이런다. 젠장! 오늘 낮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꿈속의 장면 역시. 나는 두 말 않고 미친 듯이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한달음에 달려 내려가 아래층에 도착한 나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래층의 주인집 창문 너머가 울긋불긋했다.
꿈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이다.
-119 내가 불렀어! 불렀으니까 피해!
“안에 주인집 사람들!”
-등신아! 니가 죽어!
“... 오빠가 다시 전화할게.”
나는 찢어지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연화는 무시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마당 귀퉁이, 무슨 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양동이에 담긴 물을 머리 위에서부터 들이부었다. 더럽든 말든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온몸이 축축했다.
나는 미친 듯이 다시 달려 반지하 세입자가 사는 문을 쾅쾅 두드렸다. 반지하 입구와 주인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맞닿아 있다. 자칫하면 얘는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빨리 나와! 불났어!”
다행히 반지하의 학생은 비몽사몽 하면서도 재빨리 나왔고, 나는 119 불러! 하고 외치고 주인집 현관으로 달려갔다. 손잡이가 뜨끈했지만 아직 큰 불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현관을 있는 힘껏 걷어차며 주인집 식구들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리 난동을 부려도 안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고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내가 창문 아래 놓인 화분을 집어 들자, 반지하 학생이 소리쳤다.
“형! 멀리서! 터질 수도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최대한 창문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화분을 힘껏 던졌다. 창문이 와장창 깨지는 그 순간, 무시무시한 불길이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밖으로 터져 나왔다. 어마어마한 열기와 불꽃에 나와 반지하 학생은 주저앉고 말았다.
젠장! 주인집 다 죽은 거 아니지?! 내 보증금! 삼겹살 아직 안 구워 먹었잖아요! 젠장! 할매! 상추고 대파고 다 뜯어가도 되니까 살아만 있어요!
어느새 물을 뒤집어쓰고 온 반지하 학생과 나는 몸을 최대한 숙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에 보이는 주방에서 어마어마한 불길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엄청나게 피어났다. 상상을 초월하는 열기에 몸이 익어가는 것 같았다. 셔츠의 물은 금방 뜨거워졌다.
셔츠 자락으로 코와 입을 막았지만 맵고 따가운 연기 때문에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집안 곳곳에 쓰러진 주인 할머니, 주인집 부부와 그 집 아들, 딸을 발견했다.
반지하 학생은 운동한다더니 힘도 엄청 좋았다. 시뻘겋게 달아서 맛이 간 도어록을 무시하고 문을 뜯다시피 연 것이다. 엄청난 연기와 불길이 치솟고, 사방에서 사람들 비명소리가 들렸다. 오래지 않아 소방차가 온 것인지 시끄러웠지만 나와 반지하 학생은 서둘러 주인집 식구들을 꺼내기 위해 다시 물을 뒤집어쓰고 우그러진 현관문 너머로 뛰어들었다. 저 아래, 대문 앞에서 내 전화기가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