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7-운수 좋은 날(E)>
나는 사고 이후 닷새 만에 퇴원했다. 그 닷새도 있기 싫었는데, 뭔 검사를 얼마나 하는지. 하루에 다 하면 될 것을 오늘 한 가지, 내일 두 가지, 모레 또 두 가지, 그 다음 날은 재검사. 안 아픈 사람도 병원에 누우면 아프게 된다더니. 이래서 없던 병도 생기겠다.
결과까지 보고 퇴원하자는 의사의 앞에서 아예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의사는 허허 웃으며 결과 나오면 내원하세요. 하고 퇴원을 시켜 주었다.
퇴원하는 날, 나는 형의 차를 타고 근처 호텔로 갔다. 부모님과 형수님, 어린 조카들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안아 주었다. 그렇게 큰 일 아닌데.
주인집에 불이 나고, 나와 반지하 학생이 번갈아 들어가 식구들을 꺼내왔다. 내가 제일 먼저 할머니를, 다음에는 반지하 학생이 아주머니와 딸을, 다음 차례로 내가 아들을 데리고 나오려고 했는데 연기를 마셔버려 미친 듯이 기침하다가 주저앉았던 기억이 났다. 내가 나오지 않으니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반지하 학생 목소리를 들으면서, 중학생인 이 집 아들이 다칠까 봐 내 몸으로 꼭 덮고 쓰러졌던 것은 기억한다.
거기까지가 내 기억의 전부였다.
불법 주차된 차들 때문에 소방차 진입이 늦어졌고, 소방차가 결국 골목을 죄다 밀어버리고 도착했을 때, 반지하 총각이 나를 찾으러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반지하 총각은 할머니, 아주머니, 딸과 함께 구급차를 타고 먼저 병원으로 옮겨지고, 나와 주인아저씨, 아들은 소방대원들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고. 조금만 늦었어도 할머니의 경우는 아주 위험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발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모두가 무사하다고 했다. 크게 다친 사람도 없고 집만 탄 것으로 끝이 났다고 했다. 모두가 금세 정신을 차렸지만 나만 꼬박 하루를 잤다고 했다.
“엄마아부지는 우에 왔노?”
“느그 사장이 전화 왔드라. 아침부터 니가 전화 오길래 야가 어디 아프나 했디, 느그 사장이라데. 니 살던 집에 불이 났는데, 니가 주인집 구한다고 들락날락하다가 연기 마셔서 기절했다고. 그래가 병원에 있다고 오라 캐가 히야가 공장도 나뚜고 부랴부랴 안 왔나. 여도 너거 사장이 잡아줬다. 여 있으미 병원 댕기라고 가까운데 잡았다 카드라. 아따, 사장 참하드라. 말도 사근사근하게 고상하고, 우리 걱정하지 말라꼬 의사가 하는 말 다 알아듣기 쉽게 다시 설명도 해주고. 어제 아래는 야들 데리고 뭔 월든가 하는데도 갔다 왔다 아이가. 니 취직 윽시로 잘했네. 니가 복 받았다.”
아, 그러니까...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어머니의 말을 정리하자면, 은미 씨가 집에 연락해서 알리고 부모님에 형네 식구들까지 전부 호텔을 잡아 줬다고? 조카들 데리고 놀이공원도 가고? 워메. 이런 비싼 호텔을 잡아주면 돈 어쩌라고! 돈 나갈 일 있다더니 이거였구나. 병원비에 호텔비로 몇 백만 원 넘게 들겠네.
아니, 아니다. 그래도 집에 알려주고 호텔을 잡아 준 게 어디야. 그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다. 어린 조카들까지 돌봐주고. 낯선 땅에서 아들이 사고를 당해 정신도 없는 와중에 잠이고 뭐고 생각도 못 할 텐데, 이런 배려를 해 주다니. 사기꾼이긴 해도... 사람은 참 좋아. 생각도 깊고 의외로 착한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애들이랑 무슨 놀이공원이냐. 자기가 가고 싶었던 거 아니야? 애가 애들 데리고 놀러 가다니. 위험했잖아!
“정우 니, 사장한테 무조건 잘해래이. 죽으라 카믄 죽는시늉이라도 해래이. 그런 오나 없다. 알겠나? 내 같으면 야, 평생을 뼈를 묻는다. 노비라 캐도 평생 뼈 묻을 기다. 근데 월급은 얼마 주노?”
“아, 히야. 좀. 지금도 충분히 노비처럼 잘하고 있다. 그래 잘하면 히야가 본받던지. 히야가 우리 사장님 같은 사장이 좀 돼라. 맨날 애들 쓰레기 안 버린다고 씅질내지 말고.”
“마, 확! 씨.”
형과 쓸데없는 이야기로 킬킬거리면서 예약 해 놓았다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차도 느그 사장님 렌탈 해준기다. 하면서 형은 새하얀 카니발의 문을 열었다. 헐. 나 진짜 계약서 다시 써야 할 것 같은데. 노비 계약서로... 은미 씨한테 이걸 다 어떻게 갚지?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게 됐다. 은미 씨,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부모님과 형네 부부, 두 조카까지 복닥복닥 떠들며 식당으로 옮겼다. 식당은 으리으리한 기와집이었다. 헐. 여기... 설마...
“안녕하십니까.”
역시. 며칠 사이 조금 야윈 은미 씨가 문 앞에 나와 있었다. 아니,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 온다고 식당 밖까지 나와 있어요? 부담스러워 미치겠네.
부담감에 몸이 꼬여 미칠 것 같은 나는 내팽개치고 부모님과 형, 형수님까지 달려가 은미 씨의 손을 잡고 인사하기 바빴다. 꼬맹이 조카 녀석들까지 이모, 이모 하며 신나게 매달렸다. 은미 씨는 조금의 언짢은 기색도 없이 반갑게 인사하고 조카들을 안아주기까지 했다. 와. 적응 진짜 안 된다.
넓은 방으로 안내된 우리 앞에 눈이 튀어나올 만큼 고급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졌다. 산해진미는 기본에 음식에 금박까지 입혀 놓았다. 내가 몇 번이나 끼어들어 부담감을 토로하려고 했지만, 나를 아예 무시하고 있는 부모님과 형, 형수님, 조카들과 이야기하느라 은미 씨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소사님, 회복이 중요하니 남기지 마시고 다 드세요. 소사님 건강을 위해서 일부러 약식 전문점으로 예약했어요.”
으악. 소사 소리를 여기서 들으니 몸이 다 꼬였다. 소사라는 말에 아버지의 눈이 동그래졌고 형과 형수는 그게 뭔가 하는 얼굴이었다.
“허허허! 이 모지리가 소사 소리도 듣고. 사장님 덕분에 출세했십니더.”
오잉. 아부지, 소사가 뭔지 아시는 거여?
뭐, 그게 중요한가. 나는 소사라는 말이 그저 잡일꾼을 쉽게 부르기 위한 호칭에 지나지 않다고 열심히 설명했지만 전혀 듣지 않았다. 뭐가 됐든 듣기 좋은 말이니 됐다면서 말이다.
어리둥절한 형과 형수에게 은미 씨는, 약방의 총책임자 같은 거라며 설명했다. 내가 일전에 한 재에 몇 천 하는 약을 파는 약방이라고 떠들어 놓은 덕분일까. 총책임자라는 말에 눈빛이 변했다. 엄청나게 크고 으리으리하고 유명한, 대기업 수준의 약방 책임자쯤으로 생각하나 본데, 아니다. 아니라고. 동네 약방 노비라고.
나는 더 이상 그들의 대화에 끼지 않고 열심히 밥이나 먹었다. 어쨌거나 병원 밥만 먹다가 밖에 나와서 먹으니 꿀맛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집이 없으니 당분간 호텔에서 지내고 출근은 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일은 해야 하고, 호은당에도 불을 지를만한 사람이 둘이나 있어서 불안했기에 나는 내일부터 출근하겠다고 박박 우겼다. 은미 씨는 마지못해 이틀만 더 쉬다 오라고 했고, 나는 그 제안을 승낙했다. 서울 오신 부모님과 나들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든 탓이었다.
형은 지방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데, 내려가야 한다며 이튿날 오전에 가버렸고, 나는 은미 씨가 렌트 해 준 차로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의 명소를 돌아다녔다. 생각난 김에 팔각정 뒤의 절벽에도 가 봤지만 하얀 소나무는커녕 절벽이라고 부를 만한 곳도 딱히 없었다.
이틀 동안 부모님과 재미있게 돌아다녔지만, 내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집! 내 집! 이제 어디서 살아야 하지!
이틀간의 서울 투어를 마치고 기차역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가, 형에게 전화를 했다. 형은 시간 맞추어 마중 가겠다 했고, 새 집 구할 때 쓰라고 돈도 보내 놓았다며 어울리지 않게 형 노릇도 했다. 나는 괜찮다고 사양하려다 말았다. 생각해보니 호텔비며 이것저것 합하면 돈이 꽤 들 것 같았다. 주인집도 집이 홀라당 타버렸으니 내 보증금 줄 형편도 안 될 것이다. 그 불 때문에 옆집도 피해를 봤으니 피해보상이나 벌금 같은 것도 있을 거고. 나는 고맙다 인사하고 부모님과 헤어졌다. 아쉬운 마음이 자꾸만 들어, 올해 추석엔 내려가겠다는 약속도 덜컥해버렸다.
부모님이 떠나시고, 호텔로 돌아온 나는 텅 빈 스위트룸을 둘러보다 좌절했다. 하필이면 스위트룸이야!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된 김에 먹고 죽자.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잖아. 나는 룸서비스로 점심을 해결할까 하는 마음에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어, 여보세요?”
연화의 전화가 온 것은 그때였다.
-오빠! 아직 호텔이지? 점심 안 먹었지? 딱 기다려! 나 거기 스위트룸에서 점심 먹고 싶었거든! 지금 간다!
뚝. 또 지 할 말만 하고 끊는다. 아. 진짜.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지만 척수까지 다 빨아먹는 건 아니잖아. 나는 눈물을 삼키고 메뉴판을 덮었다. 이십 분정도 지났을까. 은미 씨와 연화가 우당탕 들이닥쳤다.
“와악! 쩐다! 대박! 너무 좋은 거 아니야?!”
“그래. 어서옵쇼.”
연화는 비명을 질러가며 스위트룸 곳곳을 뛰어다녔다. 스위트룸 1박에 얼마지? 그게 8일치면... 어흑. 내 월급 다 써도 모자랄 것 같은데. 연화와 은미 씨는 신이 나서 메뉴판을 뒤져 룸서비스를 주문했고, 이내 다이닝룸에 으리으리한 식사가 차려졌다. 그래. 먹자. 먹는 거, 중요하댔잖아. 나는 돈 따위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이참에 신용카드 한 장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돌려막기만은 하지 말자. 한도... 많이 나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