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사랑방 노비>
<외전 2-사랑방 노비>
다행스럽게도 호텔 숙박비는 은미 씨가 모두 결제했다고 한다. 나는 안도감과 함께 밀려오는 엄청난 부담감에 비명을 질렀다. 은미 씨는 상관없다며 그저 웃었지만, 그거 고스란히 내 빚이잖아! 아. 사기단에 점점 더 깊이 빠지고 있다. 정말... 이젠 내 가족들까지 인질이 된 상황이다. 호구 같더니, 의외로 치밀하고 계산적이야, 이 여자. 연화보다 무서운 사람이다.
호은당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신기한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은미 씨나 연화는 그다지 신기하지 않은 듯했다.
안 신기한가...? 나는 진짜 신기한데.
“거기, 구름다리 아래가 삼도천이야. 알지? 물 색깔도 디게 오묘한데.”
“몰라. 못 봤어. 다리 입구 근처까지밖에 못 갔어. 물소리나 그런 것도 안 들리던데?”
“그래? 아쉽네. 건너갔으면 극락 구경했을 텐데.”
“그거 나 죽으라는 소리냐?”
“걱정 마. 오빠 명줄은 길어.”
아, 저 녀석은 은근슬쩍 얄미워. 은미 씨는 키들키들 웃으며 핸들을 꺾었다. 호은당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연화가 한숨처럼 물었다.
“거기 꽃밭, 예쁘지?”
“너도 아냐? 거기?”
“알지. 다시 가보고 싶겠지만 참아. 당분간은 못 가니까.”
“안 보고 싶다. 아주아주 나중에 볼란다.”
사람들이 말했다. 죽었다 살아나면 사람이 변한다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면 사소한 것들에 감사할 줄 알게 된다고. 늘 보던 것들, 늘 누리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들인지 알게 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모든 이들에게 통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딱히 잘 모르겠다. 물론 그 길이 죽으러 가는 길었고, 어르신 내외 덕분에 살아났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글쎄. 당장 내가 어떻게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당장 연화의 장난이 반갑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은미 씨의 레이싱 솜씨도 감사하지 않았다. 딱히 어느 곳의 신에게 감사하다 빌고 싶은 마음도 별로 들지 않았다. 오늘의 부연 하늘도, 오늘따라 차가 적은 도로도. 늘 보던 같은 일상에 새로운 마음 따위 들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구나. 그것이 전부였다.
어르신 내외를 만난 곳이 삼도천이 맞는지, 내가 진짜로 죽을 뻔 한 건지. 그것도 크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냥 드라마 열심히 본 내 무의식이 만들어 낸 꿈일 뿐이다. 나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어르신 내외는 내가 최근에 정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으니 꿈에 나타났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더 현실감 있지 않은가?
삼도천이니, 저승이니. 그런 건 믿지 않는다. 애초에 본 사람이 없잖은가. 저승이 있다 하더라도 죽은 사람만 볼 수 있고 갈 수 있으니, 진짜 있는지도 모르겠고. 나처럼 문턱까지 다녀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가끔 접하긴 하지만 내가 꾼 꿈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들도 그저 자신이 상상하는 모습 그대로 꿈에서 본 것뿐이다. 나 역시 그런 모습의 저승을 상상했겠지.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그런 모습을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그렸겠지. 삼도천 앞에서 기다리라 했다는 어르신의 말을 기억하고 내가 그렇게 상상한 것이다. 그래. 이게 더 정설 같다.
어느새 우리는 호은당에 도착했다. 열흘 남짓 비운 호은당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늘 보던 그 모습 그대로 삼청동 골목길 어느 구석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오빠! 퇴원 축하 선물!”
연화는 호은당에 들어서기 무섭게 나를 질질 끌고 해골바가지 방으로 갔다. 아, 여긴 또 왜. 진짜 싫다니까. 뭐, 이번엔 전신 해골이라도 세워 놨어? 들락거리는 건 일이니까 그런 거지, 싫은 건 싫은 거라고. 내가 짜증을 담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연화는 빙긋 웃으며 나를 세워둔 채 문을 열었다. 으윽. 싫다니까, 해골... 은 어디 갔냐?
“짜잔! 오빠 방이다?”
이, 이게 뭐야? 해골과 상자들로 가득했던 침침하고 지저분한 사랑채가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고작 일주일 정도 지났을 뿐인데 뭐, 리모델링이라도 한 건가? 나는 눈을 끔뻑이며 살폈다.
전등 하나 없이 침침하던 방은 환하게 밝았다. 아주아주 밝았다. 동그란 전구가 몇 개 달린 금빛 조명이 천장에서 환하게 빛나서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해골이나 뼛조각들은 흔적도 없고, 약이 가득 있던 서랍도 없었다. 벽에는 새것으로 보이는 작은 옷장 하나, 좌식 탁자가 붙어 있었고, 은미 씨가 고풍스럽다며 돌려 까기 했던 촌스러운 자줏빛 방석도 있었다. 아주 작은 소형 냉장고도 하나 있었고, 그 위에는 커피포트도 있었다. 바닥에는 푹신해 보이는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는데, 이불도 배게도 엄청나게 포근해 보였다. 딱 봐도... 비싼 거다. 겁나 비싼 거다. 개 비쌀 거야! 호텔 숙박비도 빚인데 또 빚이라니!
내가 덜덜 떠는 모양새를 감동한 거라고 생각한 건지, 연화는 신이 나서 나를 끌고 방에 들어갔다. 옷장은 내가 샀고, 탁자는 언니가 샀고, 벽지는 친환경 천연 뭐 어쩌고 하는 거고... 귀에 하나도 안 들어왔다. 옷장 안에는 조금 더 얇은 원단으로 만들어진 개량한복 일곱 벌과 청바지 두 장, 티셔츠 세 장, 얇은 재킷 하나가 들어 있었다. 연화는 뿌듯한 얼굴로 서랍을 열었다. 속옷 열댓 장, 양말 열댓 켤레, 손수건까지 있었다. 이건 도대체... 뭐냐, 늬들? 내 속옷까지 사는 건 또 뭐야!
내가 시뻘게진 얼굴로 홱 돌아서서 고함을 치려는데 은미 씨가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소리치려던 내 입이 쑥 들어갔다. 내가 머뭇거리자 연화가 대신 상자를 열었다. 크로스백 하나와 지갑, 개량한복과 잘 어울리는 운동화가 들어 있었다.
아니, 잠깐만. 이거 싹 다 명품이잖아? 이름만 들어도 후달리는 명품도 있고, 이름도 모를 옷가지도 있다. 뭐가 됐든 겁나 비싼 것들일 거 아냐! 이 이불이랑 매트랑 베개도 미친 듯이 비쌀 거고! 와, 나 진짜 미치겠네. 이걸 어떻게 받아요?
내 얼굴에 다 쓰여 있나 보다.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은미 씨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부담 갖지 마세요. 당분간 지내야 할 곳이 있어야 하잖아요. 물론 공짜로 드리는 거 아니에요. 집 구하실 때까지 쓰시면서 24시간 소사로서 맡은 바 충실히 임해 주시면 됩니다.”
아. 그러니까 결국 날 여기 처박아 놓고,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해서, 24시간 뼈 빠지게 부려먹고, 아주 그냥 뽕을 뽑겠다? 하... 치밀하다,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허허. 진짜. 얼탱이 없어. 이걸 진짜... 어떻게 한담.
이렇게 꾸며놓고 나를 들였다는 건, 내겐 선택권 따위 없다는 소리겠지. 나는 방을 둘러보다 연화를 보고 한숨 한 번, 방을 둘러보다 은미 씨를 보고 한숨 또 한 번.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기들이 사기꾼이라는 걸 이미 내게 들켜버렸으니 이참에 끌어들여서 확실하게 입막음할 필요는 있겠지. 엄청난 빚으로 발목을 잡는 이 방식... 아주 마음에 안 든다. 이거, 아주 나쁜 거라고요. 범죄랑 같은 거라고. 알아요? 무슨, 포주도 아니고...!
어휴, 모르겠다. 그냥 고임금 노비에게 좋은 방을 내 준거라고 생각하자. 노비 주제에 이렇게 좋은 방에서 좋은 것들 쓰면서 살 수 있다니, 횡재한 거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해.
“하... 하하...”
그... 하... 뭐라 할 말이 없다. 정말로. 정말, 정말로. 나는 진짜... 진짜 노비가 된 거다. 사랑채에 사는 노비. 24시간 상시 대기, 노비 박정우. 눈앞이 캄캄했다. 당장 부동산부터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