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니 Sep 23.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9-가위에 눌리는 여자(2)>




 아직 장마도 끝나지 않은 무더운 7월의 중반. 사람들은 시원한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실내 카페로 다 가버리고 호은당에는 손님이 없었다. 그나마 매일 오전에 들르시는 어르신들과 아이가 한과를 너무 좋아해서 이틀에 한 번은 꼭 들르는 젊은 부부 외에는 손님이 전혀 없었다. 매일 오던 직장인들도 요즘은 오지 않았다. 나는 대청에 드러누워 부채를 펄럭 펄럭 흔들었다. 으아. 가만히 있어도 더워! 선풍기 없어요?!

 은미 씨는 덥지도 않은가. 부채는 옆에 얌전히 둔 채 벽에 기대어 책만 읽고 있었다. 은미 씨 눈치를 살살 보다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일단 내가 더워 죽을 맛이니까. 시원한 오미자차를 타 살그머니 가져다주자 은미 씨는 빙긋 웃었다.


 “역시 아빠가 최고네요.”


 “아직 장가도 안 간 총각, 영감 만들지 마요.”


 소소하게 뭔가를 챙겨줄 때면 은미 씨는 아빠 같다며 놀렸다. 아니, 댁이 애 같은 겁니다. 하고 반박해 봤지만 은미 씨에겐 눈곱만큼의 타격도 없었다. 오히려 연화와 함께 더 애처럼 굴었다. 내가 말을 말지.

 대청에 다리 쭉 뻗고 오미자차를 홀짝이고 있으니 좋긴 했다. 간간이 부는 후끈한 바람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덥다. 미친 듯이 덥다!


 “은미 씨, 마트 갈래요?”


 탁. 은미 씨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책을 덮고 일어났다. 덥긴 더웠구나. 우리는 후다닥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나왔다. 에어컨 빵빵한 마트에서 시식코너를 돌며 시간을 죽이는 것만큼 좋은 피서도 없지.


 나는 잠시 외출 중입니다, 하는 팻말을 대문에 걸고 문을 꼭 닫았다. 은미 씨는 이미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펄럭 펄럭 날리는 게 보였다. 에어컨을 얼마나 세게 켠 거야? 전혀 안 더운 척하더니. 나는 속으로 깔깔 웃으며 차에 올랐다. 대놓고 웃을 자신은 없었다.




 마트는 낙원이었다. 정말 시원하고 쾌적했다. 아, 좋아. 우리는 어슬렁거리며 마트를 돌아다녔다. 저녁에 고기나 구워 먹자는 충동적인 은미 씨의 제안에 계획에도 없었던 숯과 고기를 잔뜩 샀다.

 사랑채 뒤에서 흙먼지를 보얗게 뒤집어쓴 반쪽짜리 드럼통이 있다. 전에 가끔 약초꾼 아저씨와 바비큐를 해 먹었는데, 아저씨가 바빠진 이후로는 못 했다고 한다. 오랜만에 숯불구이다! 하며 은미 씨는 신나서 물건을 쓸어 담았다. 쓸데없이 바비큐용 꼬치와 생닭까지 담았다. 생닭은 뭐 할 거냐니까 비어치킨 해 달란다.

 그건 진짜 못 합니다. 지난번에 약탕기로 했다가 완전 폭망 했었던 거 벌써 까먹었어요? 약탕기까지 버렸잖아요. 하지만 은미 씨는 이번엔 성공할 거라며 끝끝내 닭을 사수했다. 난 못 합니다. 진짜로. 내 말은 조금도 귀담아듣지 않는 은미 씨는 돼지고기, 소고기, 통 우럭에 생물 고등어까지 샀다. 생선은 뭐 할 거냐 했더니, 너튜브에서처럼 꼬치에 끼워 구워 먹고 싶단다.

 그건 정글 간 그 사람들만 가능한 거죠. 도대체 요즘 뭘 보는 거야?

 너튜브에서 이것저것 보는 걸 가르쳐줬더니 티브이 예능에 너튜버들의 온갖 영상까지 다 찾아보고 있다. 어휴. 고기랑 밑반찬 재료만 조금 사 오려고 했던 길이 갑자기 대 환장 파티 준비가 됐다. 양이 무식하게 많았다.


 은미 씨는 약초꾼 아저씨 내외도 불러야겠다며 전화를 걸었지만, 아저씨는 지금 울산에 계신다고 했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연화에게 전화를 걸어 초대하고, 누굴 또 부를까 고민했다. 인간관계가... 참으로 편협했다. 은미 씨의 휴대폰에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죄다 거래처 사람들 아니면 약초꾼들, 그리고 연화와 나뿐이었다. 나도 그리 잘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술 먹자고 부르면 나올 친구 한둘은 있는데. 내내 약만 만지고 산건가.

 한참을 전화기를 이리저리 문지르다 결국 시무룩한 얼굴로 전화기를 집어넣는 은미 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은미 씨, 그 ‘정글의 규칙’이요. 큰 화면으로 틀어 놓고, 우리도 같이 간 것처럼 해 볼까요?”


 나는 넌지시 물었다.

 굳이 사람 많이 안 불러도 재미있게 놀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울려 놀 사람이 적으면 어때.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재미있게, 오붓하게 놀면 그걸로 충분하지. 은미 씨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거도 프로젝터로 볼 수 있어요?”


 “그럼요. 결제만 하면 돼요.”


 “좋아요! 거기서 해 먹는 것처럼 먹고 싶었어요!”


 은미 씨는 수산물 코너로 다시 되돌아갔다. 전복, 키조개, 바지락까지 쓸어 담고 킹크랩도 샀다. 작정했네, 작정했어.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식재료야 남으면 잘 보관했다가 식사 때 쓰면 되니 괜찮다. 우울하게 있는 것보다 밝은 모습이 낫다. 나는 빙긋 웃으며 장어도 있어요. 하고 초벌구이 된 민물장어 한 팩을 들어 보였다. 은미 씨는 아이처럼 즐거워하며 다섯 팩이나 쓸어 담았다. 남으면 장어 덮밥이라도 만들어 주지, 뭐.


 해먹과 캠핑용 의자까지 사려고 하는 것을 겨우 뜯어말렸다. 휴가 때 사자고. 바다든 산이든 어디든 좋으니 그때 사자고. 그때도 노비로서 충실히 모실 테니 제발 그만 사자고 싹싹 빌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짐을 들고 호은당으로 돌아왔다. 차에서 내리니 숨이 턱 막혔다.


 “어? 누구지?”


 은미 씨는 그늘에 차를 세우고 오겠다며 골목 입구에서 나와 짐들을 내다버리고 가버렸고, 나는 거대한 장바구니 두 개와 종량제 봉투 두 개를 어깨 메고 손에 들고 낑낑대며 골목을 들어섰다. 저 앞에, 호은당 근처에 웬 허연 덩어리가 있었다. 순간 잊고 있었던 그 존재가 떠 올라 비명이 나올 뻔했지만, 그것이 그냥 쭈그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안도했다.


 “저기요, 저기요.”


 엥. 이 더위에 이 땡볕 아래에서 뭐 하는 거지? 나는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두고 허연 것을 툭 쳤다. 스르륵, 사람이 쓰러졌다.


 “와아악!”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자고 있었다. 나는 짐들을 대충 안에 들여놓고 그 사람을 호은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비몽사몽 비틀거리는 그 사람을 사랑채 마루에 대충 던져두었다. 어쨌거나 뙤약볕 아래에 둘 수는 없었으니까. 장 봐 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은미 씨가 들어서다 비명을 질렀다. 나는 주방에서 뛰쳐나갔다.


 “저저저, 뭐야! 너 누구야!”


 은미 씨는 정말 많이 놀란 것 같았다. 풀쩍 뛰어 내 뒤에 숨어서 소리만 꽥꽥 지르고 있었다.


 “아, 괜찮아요. 아까 보니까 문 앞에서 자고 있어서 들여다 놨어요. 노숙자나 뭐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어디 가출한 애거나 뭐 그런 앤가 봐요. 일어나면 물어보고 경찰서 데려다 줄게요.”


 은미 씨는 벌벌 떨다가 살그머니 나왔다. 마루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이리저리 살피더니 입을 벙끗거리며 뭐라 했다. 애가 아니라고? 나는 놀라서 다가갔다. 작고 가벼워서 나는 당연히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쯤 된 애라고 생각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은 못 봤지만, 얼핏 보이는 얼굴로 여학생일 거라고 생각했다. 가까이 가 보니... 애가 아니네? 화장도 했고? 아무리 봐도 학생은 아닌 것 같았다. 히익! 나 또 이상한 놈 되는 거 아니야?!


 “저기요, 저기요.”


 은미 씨는 아주 조심스럽게 누워 자는 여자를 쿡쿡 찔렀다. 하지만 이상한 여자는 정신없이 잠만 자고 있었다. 결국 은미 씨도 포기했는지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언젠가는 일어나겠지. 설마 저대로 죽지는 않겠지. 나는 씨씨티비 위치를 잘 확인했다. 오해의 소지가 남지 않았길 빌었다.





작가의 이전글 약방 호은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