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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Sep 24.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9-가위에 눌리는 여자(3)>




 한낮의 더위는 식을 줄 몰랐다. 저녁 무렵이 되어도 하늘은 여전히 밝았고 공기는 여전히 후텁지근했다. 얼마 전에 내린 많은 비 때문인지 습도도 무시무시했다. 곧 저녁을 먹을 시간이긴 하지만 바비큐 파티를 할 거니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나누어 먹고, 혹시나 저 이상한 여자가 깨면 주려고 두 개 더 만들어 두었다. 그냥 깨워 보내면 될 텐데 이놈의 오지랖이 하여튼 문제라니까. 내가 생각해도 난 참 오지랖이 쓸데없이 넓다. 막 샌드위치를 다 먹고 접시를 치우는데, 자고 있던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아오! 씨. 깜짝이야!”


 요즘 들어 새가슴이 된 내 심장이 벌렁거렸다. 여자는 고개를 휘휘 돌려 주변을 확인하다가 접시를 든 채 선 나와 대청에 앉아 있는 은미 씨를 발견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남의 집에 갑자기 들어와서... 저, 나쁜 사람 아니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그게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죄송합니다!”


 여자는 비틀거리며 후다닥 마당으로 내려서다 고꾸라졌다. 아, 아프겠다. 은미 씨가 얼른 다가가 여자를 일으켜 주었다. 나는 샌드위치와 주스를 들고 나왔다.


 “대문 앞에서 자고 있어서... 너무 더울 것 같아서 그늘로 저희가 옮긴 거예요. 함부로 들어온 거 아니니까 괜찮아요.”


 은미 씨는 의외로 다정하게 말하며 여자를 안심시켰다. 여자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은미 씨와 나를 번갈아보았다. 나는 샌드위치와 주스를 내밀었다.


 “좀 드실래요? 한참을 그냥 주무시더라고요.”


 여자는 쭈뼛거리면서도 거절하지 않고 넙죽 받아먹었다. 뭐야, 초보 노숙자야? 행색은 깔끔하고 멀쩡한데.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나와 은미 씨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만 끔뻑거렸다. 게 눈 감추듯 접시를 비우고, 내가 주방에 들어간 사이 은미 씨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왜 길에서 자고 있었는지, 집은 어디인지, 몇 살인지 등을 물어보았다.

 여자는 멀쩡한 사람이었다. 스물아홉 살이나 된 여자였고, 미술관의 큐레이터로 일한다고 했다. 최근 몇 달간 잠을 못 자서 운동이라도 하면 나아질까 싶어 산책을 나왔는데, 갑자기 미친 듯이 졸음이 쏟아져서 잠시 쉰다는 게 그만 잠이 든 거라고 했다.

 그게 가능해? 그 땡볕 아래에서 잠이 와? 자면서도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머리카락도 축축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동네는 처음이라서... 제가 길도 잘 모르고 그래서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여자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다시 일어섰다. 은미 씨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사님, 향유차 한 잔만 준비해 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소사로 부른다는 것은 저 여자가 곧 환자라는 뜻. 나는 차통이 정리된 찬장을 열고 향유차가 담긴 유리병을 꺼냈다.

 이것은 작년에 은미 씨가 따서 만들어 놓은 찻잎이었다. 꽃과 줄기, 잎까지 모두 넣어 만든 것이었는데 향도 썩 좋았다. 차를 준비해서 안채의 상담실로 들어갔다. 뭐야! 여기 에어컨 있었어?! 와! 지금껏 몰랐네! 약방 손님도 통 없어서 에어컨이 있는 줄도 몰랐다! 와! 배신감 쩌네!


 “드십시오. 열사병에 특효입니다.”


 여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아, 씨. 시원해. 나가기 싫어. 싫다고! 여기 있을래! 나는 아예 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미 씨가 힐긋 나를 보았지만 나는 벽에 걸린 에어컨을 노려보았다. 은미 씨는 아무 말 없이 여자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보기 시작했다.

 치사한 사기꾼. 아빠는 땡볕에 두고 지는 시원한 데서 책이나 보고. 아빠라고 또 부르기만 해 봐라.


 은미 씨는 여자의 눈꺼풀도 뒤집어 보고 혀도 내밀어 보라고 했다. 진맥 하는 것을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다란 꼬치 같은 것으로 손바닥 여기저기도 꾹꾹 눌러보고 귀도 꾹꾹 찔렀다. 여자는 수시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은미 씨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악몽은 언제부터 꾸셨습니까?”


 갑자기 악몽은 또 뭐래? 뭐,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못 잤대?


 “그걸 어떻게...?”


 엥? 말한 거 아니었어? 은미 씨도 연화 닮아가나... 갑자기 뭐야?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미 씨를 바라보았다. 은미 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기다리겠다는 뜻이겠지. 나도 궁금하다. 갑자기 꿈이라니.


 “그게... 두 달쯤 됐어요. 그때 제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가 하나 있어서 스페인에 다녀 올 일이 있었거든요. 거기 다녀와서... 처음엔 아무것도 의식 못 했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꿈이... 스토리가 생기고 꿈이 이어지고... 이상한 사람이 점점 가까이 오고... 이제는 제 몸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 으흑. 흑. 으허엉!”


 여자는 갑자기 서럽게 울어버렸다. 당황한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은미 씨는 단호하게 나를 내보냈다. 쳇. 시원해서 좋았는데. 이제부터 안채에서 쉴 거다. 나는 밖으로 나와 대청에 푹 퍼질러 앉았다. 벽에 몸을 딱 붙이니 시원했다. 으어, 좋다. 덤으로 목소리도 조금은 들린다.


 “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


 지금 주춤했다? 그치? 응? 내가 듣는 거 안다, 이거지? 그래도 난 안 갈 겁니다. 덥다고! 등이라도 좀 식히자고!


 “스페인에 1주일 정도 있다가 왔어요. 다녀온 며칠은 그냥 제가 캄캄한 어디를 막 돌아다니는 꿈이었는데... 시차 적응도 하기 전에 바쁘게 움직이고 정신없이 일해서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했어요. 꿈에서도 엄청 바쁜 것 같았거든요. 근데... 꿈은 점점 진행이 되더라고요. 전 날 깬 장면에서 이어서 재생하는 것처럼요. 점점 밝은 빛이 다가오고... 그곳에 도착하니 작은 창문이 있더라고요. 창문을 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깼는데... 깨고 나서 생각하니 창문 너머가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날 밤에는 창문을 열었는데, 갑자기 빛이 사라지고 뭔가가 창문에서 마구 쏟아져 나왔어요. 뭔지는 모르겠는데... 시커먼 뭔가가 엄청나게 많이, 막 밀려 나왔어요. 그리고 저는 도망쳤어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도망쳤어요. 몇 주를 도망만 다니다가 겨우 집에 도착했는데, 이젠 뭔가가 저를 찾아다니고 있더라고요. 제가 도망 다녔던 그 길을 하나하나 되짚으면서, 어떤 목소리가... 여기도 지나갔네, 여기도 지나갔네. 하면서 제 흔적을 따라오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얼마 전, 제가 사는 집 현관 앞에 온 거예요. 여기 있네. 하더니 문을 열려고 며칠을 또 고생을 하고... 저는 또 찝찝하니까 집에 열쇠도 바꾸고 도어록도 바꾸고 했어요. 근데 꿈에도 바뀐 열쇠, 바뀐 도어록이더라고요. 그게 더 무서워서... 가급적이면 안 자려고 했어요. 자는 동안에만 그게 따라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급하게 본가로 피해서 최대한 적게, 최대한 짧게 잤는데... 결국 제가 혼자 사는 집에 그게 들어갔더라고요. 여기 없잖아! 하면서 엄청 화를 내더니... 며칠 전에는 본가로 왔어요. 단번에 본가로 오더니... 어느 날은 현관 앞에 서서 저를 노려보고, 다음 날은 거실에서, 다음 날은 1층 계단에서, 그다음 날은 2층의 제 방 앞에서... 그리고 엊그제는 제 방 침대 옆에 서서 저를 내려다보고 웃고 있더라고요. 드디어 만났네. 하더니... 어제는... 어제는... 결국 저한테 몹쓸 짓을 하려고 했었어요. 마침 엄마가 방에 들어오셔서 잠에서 깼는데... 제 몸을 만지던 그 느낌이 지금도 선명해요. 미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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