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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Sep 25.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9-가위에 눌리는 여자(4)>




 헐... 뭐야... 이거... 귀신이 악착같이 쫓아와서 산 사람을 겁탈하려고 했다고? 그 귀신도 미친놈이네! 아니, 어디 귀신 나부랭이가 할 일이 없어서 산 사람을 겁탈하려고 해? 또라이 아니야? 전자발찌 채워서 지옥 불에 던져버려야 할 놈이네! 변태도 뭐 그런 변태가 다 있어? 순 개새끼 아니야, 그거?!


 “그래서... 거기서 이어질 꿈이 두려워 도망치듯 나오셨고, 여기까지 온 거군요.”


 “네... 사실은 운동하러 나왔다고 했지만... 저도 여기 제가 왜 왔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너무 무서워서... 그게 저를 따라다니는 거라면, 본가에 있는 가족들도 위험할 것 같아서... 더는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무작정 나왔어요. 그리고 발길 닫는 대로 아무렇게나 돌아다녔는데... 그러다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서...”


 “잘 찾아오셨습니다. 약을 드리겠습니다. 사흘 뒤 다시 오십시오.”


 “에, 예? 약, 약이요...?”


 그저 그 여자의 말만 묵묵히 듣고 있던 은미 씨는 다른 설명 하나 없이 대뜸 약을 준다고 했다. 아니, 잠깐만. 뭘 설명이라도 하고 약을 준다고 하던가. 생략하는 게 너무 많은데요. 뭔가 드르륵 여는 소리가 들리고 상 위에 상자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별리산(別離散)이라는 약입니다. 드시기 쉽게 한 포씩 포장되어 있습니다. 하루 한 번, 자기 전에 물에 타서 드시면 됩니다. 물의 양은 한 번에 다 비울 수 있을 만큼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용뇌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늘 몸에 지니고 있도록 하십시오. 특히 잠을 잘 때는 반드시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사흘 뒤, 저녁 무렵에 다시 찾아 주십시오. 오늘은 어찌 오셨는지 모르실 테니, 명함을 함께 넣어 두겠습니다.”


 부스럭거리는 비닐가방 소리가 들리고, 어리둥절한 여자의 목소리가 곧이어 들렸다.


 “전 약을 지으러 온 게 아닌데요... 여기가 약방 인지도 몰랐고요.”


 “압니다. 본능적으로 찾아온 거겠죠. 더 이상 끌면 정말로 위험하다는 것을 무의식이 깨닫고 이리로 끌고 온 것입니다. 제가 무당도 아니고,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지금 아가씨의 상태를 보아하니 약이 필요할 것 같아서 드리는 것입니다. 일단 몸부터 지켜야지요.”


 은미 씨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억지로 수상한 약을 받게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여자는 자꾸만 약은 필요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나중에는 이런 식의 강매는 고발하겠다며 언성을 높이기까지 했다. 은미 씨는 결국 소리를 질렀다.


 “그러게 왜 이상한 걸 만져가지고! 자기가 이상한 거 달고 왔으면 혼자 시달리면 되지, 왜 애꿎은 가족들에 우리까지 애를 먹이냔 말입니다! 그놈이 아가씨 흔적 쫓는 거, 알잖아요! 알고 있잖아! 그럼 그것이 우리 약방에도 올 거란 건 생각 못 했습니까? 안에 들어왔든 문 앞에서 잠을 잤든! 아가씨 발이 여기 멈추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존재가 여기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왜 모른 척합니까?! 사정이 있는 것 같아서 편히 먹고 자고 쉬게 해 주었는데 보답이 고작 그런 괴상한 놈 떠넘기기입니까? 그래도 이것도 인연이니 도와줘야겠다 싶어서 약도 주고 향낭도 줬는데, 사람을 돌팔이로 봅니까? 내가 돈 달래요? 얼마 달라고 했는데요? 나는 돈 달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뭘 신고할 건데요? 기껏 도와줬더니 말하는 본새 하고는. 나가요! 썩 나가! 다시는 오지 마요! 그놈한테 무슨 짓을 당하든 나는 모르겠으니, 알아서 잘 먹고 잘 살아요!”


 그러게 그냥 처음부터 여긴 약방인데, 약값은 안 받을 거고, 사연이 기구해서 인정으로 베푸는 겁니다.라고 말하고 시작하지. 다짜고짜 설명도 없이 정체불명의 약을 먹으라고 주는데, 나라도 안 받겠다. 나는 에휴 하고 일어나 문 앞에 섰다. 곧 여자가 씩씩대며 나올 거고, 은미 씨는 방 안에서 씩씩대고 있을 거고. 나는 들어가서 다구를 치우고 다디단 자두 주스를 만들어 줘야겠지.


 “뭐, 뭘 만졌, 만졌...!”


 “됐고, 난 더 이상 댁이랑 이야기할 마음 없어요. 약 줄 마음도 없고, 향낭도 못 줘요. 돌아가서 그 이상한 변태 새끼랑 알콩달콩 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요. 우리 약방에서 잔 건 우리 오지랖이 넓어서 좀 쉬게 해 준 것뿐이니 넘어가고, 샌드위치 값도 안 받을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는 보지 맙시다. 소사님! 손님 가십니다!!”


 아이고, 짜증 엄청 나셨네. 자두 주스에 아까 사 온 베이글도 같이 줘야겠다. 크림치즈랑 블루베리 잼 듬뿍 발라서. 나는 얼른 문을 드르륵 열었다. 아유, 무안해라. 제멋대로 구는 약사님 때문에 미안합니다. 대신 사과할게요. 어정쩡하게 선 여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갑자기 돌변한 은미 씨의 쌀쌀맞은 태도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그렇겠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간식도 주고 음료수도 주고 이야기도 들어주었던 사람이 갑자기 약 안 가져간다니까 소리 지르고 내쫓으니 이상하겠지. 근데 약, 사라고는 안 했다.


 은미 씨는 이런 일이라면 약을 그냥 줄 사람이다. 돈을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연화가 보내는 지랄이 풍년인 사람들. 그 사람들만 약값을 낸다. 그 외, 은미 씨에게서 동정심을 유발한 사람들에게는 정말 소액만 받는다. 약이 가짜가 아닐까 할 만큼 의심스러운 가격을 받는다. 이 사람도 은미 씨 기준에서는 가여운 사람이니까. 그 가여운 사람의 기준이 뭔지는 좀 모호하긴 하다만.

 여자는 우물쭈물하더니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은미 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다시 문을 닫았다. 이건 흔한 일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다. 지랄이 매일매일 풍년인 사람들은 온갖 세간 살림 다 때려 부순 뒤에야 저렇게 엎어진다. 부수고 날뛰기 전에 저렇게 정신 차리고 무릎 꿇으면 될 것을. 아니면... 은미 씨가 노린 건가?

 나는 다시 문을 닫고 대청에 앉았다. 나무로 된 마루는 시원했다. 이제는 덜 더웠다.


 “제가 뭘 만졌는데요! 뭘 만졌는지 아시는 거예요? 무당이세요?”


 “뭔 개소리야. 아, 나가요. 무당은 무슨. 사람을 도대체 뭘로 보는 거야? 여기는 약방이에요. 나는 약사고. 무식한 건지 눈에 뵈는 게 없는 건지. 댁이 뭘 만졌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무당 불러줘요? 진짜 무당한테 팩트로 맞아 볼래요?”


 오, 사기다! 사기를 시작하는구나! 그 무슨 큐레이턴가 크리에이턴가 하는 직업이 돈을 잘 버는가 봐? 혹시 이 여자, 어느 부잣집 딸인가? 그래서 알고 저러나? 오오. 크은 한 탕이 시작되는 건가요! 아니, 잠깐만. 이런 걸로 좋아하면 안 되잖아. 그냥 약 쥐어 주고 가라고 할까? 연화까지 오면 일이 진짜 커질 것 같은데... 에이. 설마. 무당 부르지는 않겠지? 그럼 스토리가 너무 뻔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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