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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Sep 29.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9-가위에 눌리는 여자(5)>




 이놈의 설마는 사람을 얼마나 잡는지 모르겠다. 옷인지 천 쪼가리인지 구분도 안 되는 옷을 입은 연화는, 들어오자마자 아예 대놓고 삿대질까지 하며 비웃었다.


 “어머나, 아직 젊은 처녀가 남근은 왜 만졌어? 웃기는 여자네. 내숭은 있는 대로 다 떨면서 말이야.”


 뭐, 뭐? 남, 뭐?! 뭘 만져? 아니, 잠깐만. 내가 잘 못 들은 것 같은데...


 “작품 보러 간 거면 작품을 봐야지, 만지긴 왜 만져? 너는 일 할 때 그림들, 다 만져보고 그림 걸어 놓니? 네가 만지면 그게 진짠지 가짠지 구분할 수 있어?”


 ... 내 머리는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무슨 소리야, 이게... 오메. 민망해라.


 “아니, 그게 아니라...! 그 골동품 상점 직원이 그렇게 하는 거라고 해서...!”


 “아니, 얘. 이거 웃기는 애네, 얘. 그렇게 멍청하게 시키는 대로 하고 사니까 지금 그 꼴 난 거 아니야! 네 고집을 왜 버려? 넌 생각 못 해? 그 머리는 장식이야? 왜 항상 남이 시키는 대로 하고 사니? 네 인생인데 왜 네가 포기 해? 조금만 더 버텼으면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자유롭게 살았을 텐데, 엄마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엄마 말만 듣고 쪼르르 남들 뒤치다꺼리하러 들어가? 그거, 너네 엄마가 너 잘되라고 시킨 건 줄 알아? 쇠고랑 찰 거 알면서 왜 그러고 살아?”


 어, 아니. 잠깐. 뇌야, 뇌야. 좀 돌아봐. 뭔가 갑자기 진도가 확 나가긴 했는데, 잠깐만... 이거 뭐 좀 큰 게 들어 있다...? 쇠고랑? 뭐 불법적인 일이 들어 있구나. 역시 이런 쪽은 연화가 정말 잘 본다.


 “누, 누구세요? 댁은 누구신데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세요? 저 아세요? 우리 엄마가 왜요! 뭐요! 다 자식들 잘 되라고...!”


 “자식들 잘 되라고 미술관 차려서 돈세탁하고 예술품 빼돌리고 밀수하고 그러니? 응? 자식 잘 되라고 자식 시켜서 암시장에서 작품 사 오게 해? 너, 그거 다 너한테 돌아와. 그건 아니? 그래가지고 너만 독박이라고, 이 멍청한 것아! 얼마나 등신이면 지 엄마한테 처발리고 있어?”


 아니, 잠깐만... 거 뭐 이상한 거 쫓아온다며? 그 이야기하는 거 아니었어? 갑자기 뭔 또 탈세 현장 잡고 그래? 아니 잠깐... 근데 연화는 이 여자가 큐레이턴가 뭔가 인지 알고 있었던 거야? 저 여자, 있는 집 자식인 거야? 그런 거야? 미리 알고 있던 거였어?!


 “등신같이 지 앞가림도 못 해서 내 집에서도 편히 못살고 쫓겨나고, 명줄은 명줄대로 다 갉아먹더니 이젠 지 몸뚱이까지 엉뚱한 놈 내주고. 어이구. 어이구, 이 바보 천지야! 이 멍청한 년아!”


 철퍽, 철퍽. 연화가 여자의 등짝이라도 내리치는지, 꽤 매운 소리가 났다. 하지만 여자는 대꾸도 없이 가만히 있는 것 같았다.

 연화의 말이 맞는 말인 것일까. 한참 연화가 멍청아, 바보야 하며 한탄하는데 그 사이로 작은 흐느낌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였구나. 또 선녀님이 오셨다 가셨구나. 참 대단해. 신당도 아닌데 선녀님은 잘도 다녀가시지.


 “아이고, 가여운 내 새끼야! 이 사람들이 너 살려주려고, 어떻게든 네 몸뚱이만은 지켜주려고 도우려고 하는데 호의를 걷어차면 어쩌자는 게야! 아가, 내 새끼야. 내 강아지야. 진짜 오늘 그러다 몸 뺏겨. 까딱하다가는 귀신 씨 키우는 수가 생겨! 너 그런 꼴 당하는 거 보고 이 할미가 어찌 눈을 감아! 아무데서나 아무거나 먹고 아무거나 만지고 그러지 마! 너도 알잖아! 너 아무거나 먹고 아무거나 쓰면 안 되는 거, 너도 알잖아! 어릴 때 가지고 다니던 거 어쨌어? 할미가 준 그 팔찌 어쨌냐고!”


 연화도 울먹거리고 있었다. 아니, 네가 왜 울어? 어... 우는 건 선녀님인가...? 근데 그 선녀님이 아닌 것 같은데. 대답하는 여자는 아예 꺽꺽 넘어갔다.


 “으흑. 흑... 줄이 끊어져서... 집에... 여의도 집에...”


 “어이구, 그래도 그게 중한지는 알았구나. 집에 가거들랑 은줄에 꿰서 목에 차고 다니거라. 늘 지니고 절대 빼지 말고! 할미가 준 거 절대, 절대 빼면 안 된다. 알겠지, 아가? 응?”


 엉엉. 닫힌 문 너머에서 서럽게 우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할미, 아가... 분명히 저건 연화의 목소리도, 선녀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조금 굵은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기가 아주 셀 것 같은, 호통 한 번 치면 산이 우르릉 울 것 같은 엄청난 기개의 할머니 목소리였다. 연화는 선녀 모시는 거 아니었나? 할머니 선녀도 있나?

 간간이 이어지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저 여자의 할머니인 것 같았다. 저 여자의 할머니 귀신이 와서 연화의 몸에 들어간 걸까? 그게 법당도 아닌데 가능한가? 오늘은 부채나 방울도 없는데. 옷도 요란 법석하고. 뭐, 그런 건 상관없는 걸까?


 여자는 할머니, 할머니 하며 엉엉 울었다. 연화도 그래, 내 새끼야. 할미가 내 새끼 꼬옥 지켜주마. 하며 함께 울었다. 나는 괜히 코끝이 시큰해져서 주방으로 갔다. 차를 내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레몬밤이라는 틴 케이스를 꺼냈다. 

 얼마 전에 은미 씨가 사 온 차인데, 심장박동과 혈압, 신경을 안정시키는 데 탁월하다고 했다. 특유의 향과 함유한 뭔 이상야릇한 이름의 성분 덕분에 우울증에도 좋다고 했다. 향도 꽤 상큼하던데 이거라면 분위기도 전환될 것 같았다.

 레몬밤 가루를 길고 투명한 유리잔에 넣고 따뜻한 물을 부어 잘 녹인 다음, 얼음을 가득 넣었다. 금세 시원하고 상큼한 레몬밤 아이스티가 만들어졌다. 마당 수돗가 옆에서 키우는 허브 중에서 민트 잎을 두어 장 따서 위에 올리니 꽤 그럴듯했다. 나는 상큼한 잔 세 개를 쟁반에 받쳐 들고 상담실의 문을 두드렸다. 연화의 몸을 빌어 울던 할머니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갔다.


 눈이 팅팅 부은 채 서럽게 우는 여자와 얼른 눈물을 닦는 연화, 무표정하게 앉아서 노리개처럼 생긴 은색 장신구를 만지작거리는 은미 씨. 나는 그들 사이에 놓인 상 위에 음료수를 한 잔씩 올려 주었다. 은미 씨는 곁눈으로 나를 보고 자기의 옆 바닥을 보며 눈짓했다. 나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으, 시원하다. 내 것도 만들어 올걸.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은미 씨는 자기 몫의 음료수를 내게 주었다. 자기는 이거 먹으면 속이 쓰리다나. 감사합니다, 주인님! 크히힛. 아오, 상큼해.


 “선녀님과 아가씨의 할머님이 다녀가신 걸로 설명은 충분히 된 것 같으니... 약은 드시겠습니까?”


 연화의 몸에 들어왔던 할머니의 혼은 나간 것 같았다. 연화는 다시 새침한 얼굴로 멀찍이 물러나 앉더니, 레몬밤 에이드를 홀짝홀짝 마셨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음료수만 마셨다. 여자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울고 있었다. 은미 씨는 서랍을 열어 뽀얀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여자는 그것을 받아 들고 얼굴을 뒤덮은 눈물과 콧물을 닦았다. 은미 씨의 얼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엄청나게 찡그리고 있겠지.


 “네, 크흡. 네. 얼마가 됐든 약값은 섭섭잖게 드리겠습니다.”


 “약값은 사흘 뒤, 다시 오시면 받겠습니다. 꿈을 꾸든 안 꾸든, 마무리를 해야 하니 사흘 뒤에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새침한 말투와는 달리 조금 전보다는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여자는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나왔다. 나는 문 밖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아십니까?”


 “네. 저 아래에 차를 대어 놓은 기억이 났어요. 정말...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살펴 가십시오.”


 나는 여자를 배웅하고 들어왔다. 어으, 더워.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방으로 돌아가자! 나는 냅다 뛰어 방으로 들어갔다. 연화는 뭐가 불만인지 입술을 쭉 내밀고 있었고 은미 씨는 바닥에 놓인 손수건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게나 털썩 앉고 눅눅해진 손수건을 쟁반 귀퉁이에 올려놓았다. 은미 씨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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