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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Oct 05.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9-가위에 눌리는 여자(6)>




 주섬주섬 방을 정리하는데, 훌쩍거리던 연화가 휴지뭉치를 슬그머니 쟁반에 올려놓고는 일어났다.


 “어, 왜? 가려고? 온 김에 놀다가 고기 먹자.”


 “법당 열어놓고 왔어. 갔다가 이따 밤에 올게.”


 코가 꽉 막힌 맹맹한 목소리로 훌쩍거리던 연화는 올 때처럼 휭 나가버렸다. 연화가 그렇게 가버리니 왠지 이상하고 찝찝했다. 거, 참. 녀석. 안 그러더니 오늘 왜 저러지. 무슨 일 있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남은 음료수 잔을 쟁반에 차곡차곡 담았다.


 “은미 씨, 연화 무슨 일 있대요?”


 “아니요. 없어요.”


 은미 씨는 단칼에 대답했지만... 아니다. 뭔가 있다. 뭔가가 찝찝한... 뭐 이상한 거 있다. 연화에게 무슨 일이 있다. 그리 오래 본 건 아니지만, 내가 봐 왔던 두 사람의 모습이나 성격을 곱씹어 보면, 연화의 기분이 아주 좋지 않고 은미 씨 역시 기분이 나쁘다. 두 사람, 아주 기분이 더러운 상태다.

 그냥 짜증 나고 화나는 게 아니라... 뭔가 있는데. 확실한데. 뭐가 됐든, 그게 뭔지 절대 말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정말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쟁반을 들고 나왔다. 그래. 많이 알지 말자. 깊게 관여하지 말자. 이미 사기꾼 패거리가 되긴 했지만, 더욱 깊은 곳까지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저 깊은 사기의 수렁에 깊이 빠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잔들을 깨끗이 씻어 치우고 냉장고를 열었다. 이제 슬슬 저녁 바비큐 준비를 할 시간이다. 엄청난 양의 생선, 조개류, 거대한 킹크랩에 절대 비어치킨이 되지 않을 생닭까지. 어마어마한 양의 재료들이 냉장고를 꽉꽉 채우고 있었다.

 그래. 맛있는 거나 많이 해 주자. 잘 먹고 잘 쉬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트레스는 풀리겠지. 둘 다 먹어서 조지는 스타일인 것 같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줘야겠다.

 어디 보자, 너튜브에서 전에 봤는데. 바비큐 하면서 바지락 술 찜 하는 게 있었는데. 포일에... 아, 여기 있네. 칼칼하게 청양고추 좀 넣고 만들어 줘야겠다. 나는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바지락을 소쿠리에 쏟아부었다.




 그날 저녁, 느지막한 시간에 연화가 왔다. 연화는 몇 시간 전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평소처럼 쾌활하고 발랄한, 헐벗은 꼴로 들어왔다. 아니, 진짜... 이건 아니잖아! 입은 거야, 벗은 거야?! 나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너 진짜! 옷 그 따위로 입고 다닐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그따위로 입고 돌아다녀! 미친놈이 칼 들고 덤비면 네가 유단자라 해도 못 이겨! 네가 무슨, 어디 특전사 출신이야?! 그리고! 그렇게 헐벗고 다니면 벌레나 모기한테 얼마나 뜯기는지 몰라? 모기한테 물려서 가렵다고 짜증 내지 말고! 긴 거 입으라고! 긴 거 싫으면 향수 말고 모기 기피제를 뿌리고! 오빠가 그랬지? 향수 냄새 맡고 모기 달려든다고!”


 “아, 진짜. 아빠! 좀! 그만 해! 나도 내 개성이 있어! 그리고 기피제는 냄새 구리단 말이야!”


 “개성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당장 옷 갈아입어! 갈아입고 기피제 뿌리고 나와! 마당에서 놀다가 모기 물렸다고 짜증 내지 말고!”


 “아, 진짜! 아빠는 조선시대 사람이야?! 요즘 유행도 몰라!”


 “유행... 야, 유행도 유행 나름이지! 그리고 그게 요즘 유행이야? 대문만 나가도 그렇게 입고 다니는 사람 없거든!”


 “아, 몰라! 아빠 미워!”


 “아니, 저 지지배가...!”


 연화는 쿵쾅거리며 안채로 쏙 들어가 버렸다. 디딤돌에서 한참 떨어진 마당에 송곳을 매달아 놓은 것 같은 하이힐이 나뒹굴었다. 나는 씩씩거리며 굴러다니는 구두를 주워 디딤돌에 올렸다.


 “이게 구두야, 흉기야? 차라리 사다리를 붙이고 다니지. 요즘 슬리퍼나 샌들도 굽 낮고 예쁜 거 많더만. 지가 무슨 슈퍼모델이야? 이런 것만 신고 다니고. 이거 신을 수나 있어? 올라타는 거 아니야?”


 구두를 올려놓고 주방으로 돌아가는데, 뒤에서 꺽꺽 거리는,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은미 씨가 빔 프로젝터를 설치하고 있었다. 어이구. 아예 우시겠습니다?

 어, 잠깐. 너무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서 인지 못 했는데... 방금 연화랑 내 대화, 뭔가 좀 이상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잔소리라 그냥 자연스러웠는데. 이거 좀... 진짜 부녀지간 같잖아! 미친 거 아니야?! 아, 진짜! 저 장난꾸러기 지지배가!

 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안채를 바라보며 한숨을 흘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헐렁한 셔츠와 헐렁한 긴 바지를 입은 연화가 나왔다. 이죽이죽 웃는 걸 보아하니, 아까 그 대화가 저 녀석의 농간임이 틀림없구나. 저 꼬맹이 녀석. 꿀밤 한 대 먹여줘야겠다. 저게 요즘 심심하면 총각을 아저씨 만들어!


 하지만 나는 연화를 때릴 수 없다. 선녀가 무서워서가 아니다. 저렇게 아빠와 딸 놀이를 하면서 바락바락 덤비긴 하지만 늘 순순히 따라준다. 잔소리 쟁이라고 화를 내면서도 저렇게 순순히 옷도 갈아입고 화장도 지운다. 연화도 나도, 이 상황이 기분 나쁘다거나 싫은 것은 아닌 탓이겠지. 그리고 저렇게 싱글싱글 웃으며 나오는 애를 어떻게 때릴 수 있을까. 화가 나다가도 가라앉았다. 저런 장난도 귀여우니까.

 사실 그 옷들도 저 좋아서 입고 다니는 건데, 내가 저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가 뭐라고 상관을 하겠는가? 하지만 그간 든 미운 정도 정이라고, 걱정되는 건 사실이다.

 연화가 예쁜 건 인정한다. 헐벗은 옷이긴 해도 잘 어울리기도 하고. 하지만 예쁜 것만 찾다가 건강 다 상하고 위험해진다면 말리고 싶다. 아빠의 마음인지, 오빠의 마음인지, 아씨를 모시는 돌쇠의 마음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눈에 불을 켜고 연화를 훑어볼 남자 놈들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 내 딸은 내가 지킨다...!

 아니, 이게 아닌데.


 은미 씨는 빔 프로젝터 설치를 아주 능숙하게 마쳤고, 내가 미리 결제를 해 놓은 정글 예능을 벌써 틀고 있었다. 드럼통에 숯불을 지피고 은미 씨와 연화가 주문한 그대로 이것저것 올렸다. 연화는 약탕기에 얼음을 채우고 캔 맥주를 잔뜩 담아 들고 나왔다. 시원한 캔이 내 볼에 닿았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연화가 웃고 있었다.


 “아빠, 맥주!”


 그래. 아빠든 오빠든 무슨 상관이야. 재미있으면 됐지. 하루하루가 즐거우면 됐지. 안 그래? 나는 웃으며 연화와 은미 씨가 내민 캔 맥주에 내 캔을 틱 하고 갖다 댔다. 오늘 하루도 즐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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