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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Oct 06.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9-가위에 눌리는 여자(7)>





 사흘이 지난 저녁, 초보 노숙자 같았던 여자가 멀끔한 사람이 돼서 호은당에 찾아왔다. 연보라색 잔꽃무늬로 가득 채워진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고, 대충 묶고 있었던 단발머리도 예쁘게 다듬은, 우아하고 지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 여자는 꾸미기 나름이라더니. 연화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 똑같구나.


 “어서 오십시오. 약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공손하게 인사하고 안채로 안내했다.

 기다리기는. 더워서 죽기 직전까지 밖에서 뒹굴다가 결국 더위 먹고 한 시간 전에 들어가서 에어컨을 켜고 드러누워 있다.


에어컨을 왜 그리 안 키나 했더니, 실외기 소리도 시끄러운 데다 전기세가 많이 나와서 그렇다고. 돈도 많으면서 겨우 그런 걸로 아끼냐고, 그러다 큰 병나서 돈 더 깨진다고 잔소리했더니 작은 돈을 아껴 모아야 부자가 된단다. 얼씨구나. 엄청난 자산관리사 납셨어요.

 내가 손님 왔다가 병 얻어 가겠다고 한 소리 한 뒤에야 은미 씨는 구시렁거리면서 에어컨을 켰다. 그것도 무더위에 얼굴이 시뻘겋게 익은 뒤에야 들어가서 켰다. 어우, 보는 내가 익는다. 내일부터는 열두 시 땡 하면 에어컨 켤 테다.


 여자는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단정한 갈색 구두를 가지런히 돌려놓고 안채의 상담실 문을 열었다. 은미 씨는 멀쩡한 얼굴로 여자를 맞이했다. 문 앞에 서서 입술을 실룩거리는 날 보더니 은미 씨는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앞에 앉으세요. 소사님, 시원한 매실차로 부탁드립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문을 닫았다. 그럼 그렇지. 아까부터 덥다고 아이스크림 세 개를 연달아 먹더니 배 아프겠지. 매실차가 복통이나 설사에 좋다는 것을 나도 안다. 아무래도 배탈이 난 것 같다. 으이그. 내일부터는 에어컨 켜놓고 뜨거운 차를 갖다 줘야겠다.

 나는 5년 묵었다는 매실 효소를 국자로 떠서 주방으로 들고 갔다. 빨리 타서 가지고 가야지. 무슨 이야기 할지 너무 궁금하다. 이번엔 내 몫까지 만들어서 쟁반에 담았다. 톡톡. 문살을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끊어졌다. 내가 들어가 상 위에 매실차를 두 잔 올려놓고, 내 몫을 잔을 들고 옆으로 슬그머니 빠졌다. 내가 나갈 기미가 없자 은미 씨가 돌아보았다. 뭐. 나도 여기 있을 건데요. 밖에 덥거든요. 은미 씨의 눈은 당장 나가라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무시하고 자리를 잡고 앉아 매실차를 호로록 마셨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앞의 여자를 보았다.


 “그럼 그 목걸이는 하고 계십니까?”


 “네. 급한 대로 다른 목걸이 펜던트를 빼고 그걸 걸었어요.”


 여자는 목 언저리를 더듬어 목걸이를 빼냈다. 청록색 불투명한 돌이 은색 틀 안에 들어 있었다. 척 봐도 팔찌 장식이었던 것을 알 것 같았다. 체인이 들어가지 않아서 목걸이 잠금 핀에 끼워 걸어 놓았다. 그래도 악착같이 한 걸 보니, 어지간히도 겁이 났었나 보다. 나는 호로록 매실차를 마시며 목걸이를 구경했다.

 그때, 은미 씨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왜, 왜요! 왜! 뭐! 왜!

 은미 씨는 굳은 얼굴로 내 앞에 몸을 낮추더니 팔을 뻗었다. 그녀의 새카만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보며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아니, 더워서 쉬는 건데! 왜, 왜요! 아무리 노비라도 최소한 사람 대우는 해야지! 아니, 멱살은... 좀...

 턱! 은미 씨 손이 닿은 곳은 내가 기대어 있는 장식장의 서랍 손잡이였다. 아... 쫄았네. 내가 움찔거리는 것을 본 은미 씨는 씩 웃었다. 와. 씨. 이 사람이 진짜.

 드르륵. 서랍을 열고 꺼낸 것은 작은 상자였다. 예쁜 무늬가 새겨진 모양새를 보아하니, 보석함 같았다.


 “목걸이, 잠시만 빼 보십시오.”


 여자는 우물쭈물했다. 목걸이를 뺀다는 것이 목숨이라도 꺼내는 것처럼 불안하고 두려워 보였다. 은미 씨는 빙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여기에 그놈은 못 들어오니까요.”


 그 말에 안심을 한 걸까. 뭘 믿고 그 말을 믿는지 모르겠지만 여자는 한결 밝은 얼굴을 하고 목걸이를 풀었다. 그래. 저러니 연화가 멍청이니 바보니 하면서 화를 냈지. 바보네, 바보야. 그 말을 어떻게 믿는지, 뭘 믿고 저러는지. 저런 사람은 조금만 잘해 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떼다 바칠 거야. 어휴. 호구되기 딱 좋은 사람이네. 하긴. 그러니 지금도 호구 잡혀서 저러고 있지.

 여자의 목걸이가 상에 톡 닿았다. 은미 씨는 상자를 열었다. 역시 보석함 같은 거였다. 내가 앉은자리에서는 내용물까지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안쪽에서 무언가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자잘하게 깨진 빛 알갱이가 까만 보석함 내부 벽면에 아른아른 비쳤다. 은미 씨가 뒤적일 때마다 무지개 색으로 흔들렸다. 이내 은미 씨가 꺼낸 것은 돌돌 말린 아주 가느다란 은색 실이었다. 아니, 철사인가?

 은미 씨는 철사를 펴더니, 여자가 내려놓은 목걸이의 펜던트를 떼어 내고 그 철사로 돌돌 말았다. 엄청나게 가는 실로 청록색 보석을 감는 것처럼 보였다. 은미 씨는 꽤 정성 들여 펜던트를 감았다. 동그랗게 만들어진 은빛 그물 공 안에 청록색 보석이 들어갔다. 펜던트를 감으면서 은미 씨는 무언가 동그란 구슬 같은 것을 함께 넣었다. 뭐지? 가만히 보고 있던 여자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미 씨는 악한 것을 쫓는 향이라고 했다. 손으로 몇 번 쓰다듬으니 동그란 공이 됐다. 은실로 만든 공 같은 그것을 목걸이 줄에 꿰어 내밀었다. 오, 손재주 좋은데? 근데 음식은 왜 그렇게 못 해요?


 “이렇게 하고 다니면 보기도 좋고, 잃어버릴 염려도 없습니다. 은은 변색이 잘 되니 관리 잘하시고... 혹시 닦아도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변색된다면 가지고 오십시오. 안에 든 향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사라지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자는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고 얼른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저걸 만드는 십 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여자는 초조함에 손을 얼마나 쥐어뜯었는지 모른다. 피 안 나나? 손톱이 빠졌을까 봐 걱정이 됐다. 은미 씨는 빙긋 웃더니 차를 마셨다. 여자도 눈치를 살피다 매실차를 호록 마셨다. 갑자기 티타임이다. 나도 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럼, 그 날 돌아가신 후의 상황을 들려주시겠습니까?”


 여자는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더 있었나? 뭐 약이랑 향낭인가 뭔가 하는 것도 줬잖아? 근데 또 그 변태가 찾아왔나? 나는 눈을 반짝이며 손에 든 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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