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니 Oct 07.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9-가위에 눌리는 여자(8)>




 “그 날은... 잘 잤어요. 정말로 푹 잤어요.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낮에 여기, 약방에서 잔 것처럼 아무 꿈도 안 꾸고 너무너무 편하게 잘 잤어요. 잠을 잘 자니 입맛도 돌고, 몸도 기분도 좋았어요. 그런데 다음 날은 꿈에 그놈이 나타났어요. 저는 제 방에 누워 자고 있었는데... 집 밖에서 그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다니고 있었어요. 집 주변을 빙빙 돌면서, 어디 갔어. 왜 날 거부하는 거야. 돌아와. 날 버리지 마. 사랑해... 그렇게 말하면서요. 소름이 끼쳐서 벌떡 일어났는데, 창밖으로 내다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서... 창문을 열었다가 창문으로 들어올 것 같아서... 그냥 꼬박 밤을 새웠어요. 그리고 어젯밤에는 제 방 창문 아래에서 울었어요. 정말 서럽게 울면서...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만 반복했어요. 미치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한참 울다가 어디론가 가버렸어요. 그러고 나서야 깼는데... 찝찝해서 창문은 안 열고 커튼만 걷어서 아래를 봤는데 아무것도 없었어요. 당연하겠지만. 새벽쯤 다시 잠들었는데, 여의도의 제 집에서 그 남자가 울고 있었어요. 제 집의 현관 앞에 앉아서 슬프게 울고 있었어요. 너무... 불쌍했어요.”


 미친 거 아니야?! 그 변태 귀신이 무슨 짓 하려고 했는지 그새 까먹은 겁니까? 나는 물고 있던 매실차를 단숨에 꿀떡 삼키고 소리쳤다.


 “불쌍하긴 뭐가 불쌍합니까! 무슨 일 당할 뻔했는지 몰라요? 바봅니까? 그런 놈이 왜 불쌍합니까! 잡아다 족쳐도 시원찮을 변태 귀신 새끼가 불쌍해요?!”


 “소사님, 진정하시고요...”


 아. 그래. 그렇지. 나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여자와 은미 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아니, 그런 놈이 불쌍할 게 뭐 있는데? 와. 진짜. 저 여자는 호구 중에 상 호구다. 진짜 호구 킹이다. 갈아 죽여도 시원찮을 귀신을 갖다가. 어... 근데 귀신인 건 맞나?


 “그... 동정심을 가지시면 안 됩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세연 씨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했던 존재가 아닙니까? 생각보다 집념이 강한 존재인 듯합니다. 여의도에 있다는 집에는 당분간 가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전에 보셨던 선녀님을 모셔서 조만간 자리를 마련할 테니, 그때까지는 본가에 계시고 약을 조금 더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보통은 사흘 정도면 되는데... 이틀 치를 더 드리겠습니다. 향낭은 잘 가지고 계시지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원피스의 허리춤을 잡았다. 원피스 허리를 묶은 리본에 은빛 동글납작한 판과 새빨간 술이 달린 작은 노리개가 보였다. 어라. 있는 줄 몰랐는데. 동글납작한 판은 정교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지만 무슨 모양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은미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뒤에 다시 오십시오. 그 날 향낭도 교체를 하고... 선녀님을 모셔 보겠습니다. 그 사이, 언제라도 그 존재의 행동이 변하거나 집 안이나 방으로 들어온다면, 시간 관계없이 무조건 오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 새벽... 에도 괜찮을까요?”


 “상관없습니다. 깬 즉시 달려오십시오. 향낭은 절대 몸에서 떼 놓으시면 안 됩니다. 명심하십시오.”


 은미 씨는 작은 봉투에 하얀 약포로 싼 약 두 개를 넣어 내밀었다. 여자는 봉투를 소중히 받아 가방에 넣었다.


 “약 값으로 얼마를 지불해야 할지 잘 몰라서... 주변에 물었더니 여기를 아는 분이 계셔서 그분께 조언을 얻어 준비했습니다. 적당할지 모르겠어요.”


 봉투가 들어가고, 봉투가 나왔다. 하얀 봉투에 금빛 꽃이 그려진 고급스러운 봉투가 상 위에 올라왔다. 은미 씨는 힐긋 봉투를 보고는 가만히 있었다. 봉투는 납작했다. 여자가 머뭇거렸다.


 “그... 제가 준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인데... 모자랄까요...? 더, 더 준비할 테니 우선 이거라도...”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은미 씨는 상당히 주저하고 있었다. 약값을 받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있어서 곤란한 걸까? 그래서 액수 확인을 못 해서 그런가? 내가 나가야 하나. 근데 얼마인지 궁금한데. 이건 사기 치는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사기 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려 했다.


 “아닙니다. 일단은 받겠습니다. 단,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약값 조언 한 사람이 아무래도 거물이겠지. 몇 천, 몇 억 주고 약 받아 간 사람이 이야기했겠지. 저 여자도 그런 부류라고 했으니까. 그러니 입단속시키려는 거겠지.


 “치료가 끝나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뭐, 핑계 삼아 약이라도 왕창 팔려는 건가? 아니면 액수가 꽤 커서 뭐라도 줘 보내려는 건가? 아, 궁금한데. 얼마 들었지? 봉투만 살짝 보면 안 되나? 나는 주춤거리다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예. 선생님께서 시키시는 거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약속하셨으니 받겠습니다. 그럼, 이틀 뒤에 다시 오시고... 혹시라도 이상이 생기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여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상 위에는 여전히 봉투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은미 씨는 봉투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나는 문을 열어주고 여자를 배웅하기 위해 대문을 열었다. 여자는 밝은 얼굴로 나서며 내게 꾸벅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은미 씨는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후끈한 열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힐긋 상담실을 살폈다. 문이 스르륵 닫혔다.


 “예. 살펴 가십시오.”


 여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또각또각 멀어졌고, 나는 얼른 문을 닫고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덥기도 더웠지만 봉투 안 액수가 너무 궁금했다. 방에 들어간 나는 실망했다. 봉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 넣었대요?”


 호기심을 이기지 못 한 내가 물었다. 은미 씨는 픽 웃었다.


 “왜요? 최대한의 성의가 얼마인지 궁금하신 거예요?”


 “뭐... 좀. 그렇죠.”


 “저도 몰라요. 나중에 돌려줄 거니까요.”


 “에엑? 약값인데?”


 “돈 말고 다른 걸로 받을 거예요.”


 그럼 그렇지. 은미 씨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또 저번처럼 물건으로 달라하겠지. 상황을 보아하니, 이 여자도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다.


 지금까지 온 손님들 중에 이런 괴상한 손님들이 간혹 있었다. 연화까지 연결이 되는 미스터리한 일이 있는 손님들은 정말 일이 복잡했으니까. 어떤 사람은 연화와 은미 씨가 해결할 수 없어서, 대사님이라 부르는 어느 스님에게 보내 엄청나게 큰 제를 올리고 어마어마한 약을 지어가기도 했다.

 우리 약방에 오는 손님은 일반적인 약을 찾는 손님이 아니라는 것쯤을 이제는 안다. 단순히 자식을 낳게 해 달라, 딸을 아들로 바꿔 달라, 죽기로 예정된 사람을 살려달라는 손님들은 별 것 아니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내가 직접 보고 만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에도 믿어지지가 않는 그런 일들이 있다. 그야말로 미스터리한, 신비로운 일들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어느 만화책 속에서나 나올 법 한 이야기, 어느 드라마에서나 다룰 법 한 이야기들을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들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몇 달간 지켜보며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나는 아직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 했다는 것. 아직 세상엔 내가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무시무시한 결론에 도달했다.


 호은당은, 단순한 한약방이 아니다. 여기는 한약(韓藥)을 파는 곳이 아니라 묘약(妙藥)을 파는 곳. 믿을 수 없는 일을 믿게 되고, 그 믿음이 현실이 되는 기적을 파는 곳. 호은당은 사람을 살리고 치료하는 약이 아닌, 사람의 믿음을 현실로 바꾸어 주는 기적을 파는 곳이다.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신의 영역을 넘보는 신비한 약사 백은미가 기적을 행하는 곳. 그곳이 삼청동 구석에 자리 잡은 이 한옥 약방의 진짜 모습일 것이다.


 뭐, 지금까지 내가 본 것만 생각하면... 약 한 재 오천 만원이라고 해도 과감히 털어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의 이전글 약방 호은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