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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Oct 12.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9-가위에 눌리는 여자(E)>





 이틀 뒤, 은미 씨는 커다란 캐리어를 꺼내놓고 이것저것 담고 있었다. 한지로 싼 동그랗고 납작한 물건 몇 개, 괴상한 냄새가 나는 약봉투, 향과 금빛 향로까지 챙겼다. 나는 그녀가 내미는 것들을 한지로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포장해 다시 되돌려주길 삼십 분 동안 반복하고 있었다.


 “그럼 그 사이에 약방 손님 오면요? 예약 있잖아요.”


 “예약 손님께는 연락드렸어요. 다른 손님은 뭐... 다음에 오시라고 해야죠.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요.”


 그렇다. 은미 씨는 지금 연화가 선녀님을 모시는 법당으로 가기 위해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여기서는 연화가 할 수 있는 것이 한정적이라 그렇단다. 생각보다 그 여자의 상태는 심각한 듯했다.


 어제 새벽, 여자가 울면서 은미 씨에게 전화를 했단다. 애걸복걸하던 놈이 불같이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고, 여의도의 집에 불을 지르는 꿈을 꾸었다면서 말이다. 나는 자다 말고 불려 나와 은미 씨와 함께 여자의 집으로 갔다 왔다. 여자는 잠옷 차림으로 부리나케 뛰쳐나와 호은당으로 왔다. 날이 훤하게 밝을 때까지 두 사람은 상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무슨 죄인가. 차를 타다 주고 약 먹은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은미 씨는 오늘 영업은 쉬어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단골들은 매일 온다. 조금 일찍 닫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두 사람은 호은당을 나섰다.

 두 사람이 서둘러 떠나고, 아직 영업시간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어차피 밥은 혼자 대충 먹으면 되니, 조금 더 자도 되겠지. 나는 상담실로 들어가 에어컨을 켜고 벌렁 누웠다. 아. 시원하다. 얼마나 좋냐. 조금만 자자. 나는 푹신한 방석을 도르르 말아 머리에 받치고 눈을 감았다. 크. 낙원이구나.


 툭. 툭툭. 툭.

 대문을 흔들면, 질러 놓은 빗장이 부딪치며 툭툭 소리가 난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몇 시지? 그런데 이상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도 떠지지 않았고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다. 뭔가가 내 몸을 꽉 안고 있는 것 같았다. 헐. 설마... 이게 가위눌리는 건가? 그 사이, 대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덜컹덜컹! 문이 격하게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단골 어르신들인가? 문을 열어야 하는데. 나 일어나야 하는데. 와. 무섭다! 진짜 무섭다! 내 몸이 내 말을 안 듣는다! 난생처음 눌리는 가위에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 손가락 하나만이라도 까딱하면 풀린다고 하던데, 그럴 정신이 어딨어!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지만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 몸이 내 의지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미칠 듯이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열어! 당장 열어!”


 그때, 대문 너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나름 발버둥을 치던 내 의식이 우뚝 멈추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다. 아무리 무대포 갑질 귀족들이라도 저런 식으로 행패를 부리지는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굉장히 신경 쓰기 때문에, 밖에서는 진상 짓을 하지 않는다. 호은당의 대문 앞에서 저렇게 난동을 부릴 사람은 없다. 절대로. 그럼... 누구지?


 “이거 열어! 숨겨놓는다고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내 거야! 내 거라고! 다 죽여 버리기 전에 순순히 문 열고 내보내라고!”


 아. 그제야 깨달았다. 저것이 그것이구나. 세연 씨를 쫓아다닌다는 그거. 놈은 지금 세연 씨가 여기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찾아온 것 같... 아니, 잠깐만. 지금 내가 꿈꾸는 거 아닌가?! 내 꿈이잖아? 이런 시발!!

 나도 모르게 욕지기가 터져나갔다. 그때, 문 너머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것이 갑자기 뚝 끊어졌다.


 “너... 너 뭐야. 너 뭐하는 새끼야?! 너 내 여자랑 무슨 사이야!”


 뭔 개소리세요? 니 여자가 누군데? 왜 나한테 그래? 아니, 그것보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나는 이제 무서운 것을 떠나 어이가 없었다. 아니, 왜 내 꿈에 나타나는 건데?!


 “이세연! 내 세연이! 내 거라고! 내 아이를 가질! 내가 선택한 여자! 내 여자라고!”


 아. 내가 생각하는 게 들리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한번 말을 걸 듯 생각했다.

 너 누구세요? 너 누군데 나한테 시비세요? 나 아세요? 님, 누구삼?


 “너... 죽여 버릴 거다. 감히 내 세연이를 훔쳐가고도 뻔뻔스럽게... 나한테 감히 그따위로 지껄이다니... 나와. 나와서 남자답게 붙자.”


 아. 들리는구나. 내 생각이 말로 들리는구나. 깨닫자마자 대문이 쾅쾅, 부서져라 흔들렸다. 아니, 야. 아침부터 그렇게 지랄하면 민원 들어가. 시끄러워. 경찰한테 잡혀 간다? 그만 해라. 대문은 네놈이 아무리 쇼를 해도 못 열어. 그러니까 가. 내가 왜 너랑 붙어? 나는 세연 씨한테 관심 없는데. 뭔 개가 짖나. 월월.

 대문 너머에서 비명과 울음이 섞인 괴상한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어이구. 저러다 동네 사람들 다 깨겠네. 이제 경찰 온다. 철컹철컹. 바이 바이. 나는 지금 가위에 눌리고 있다는 것도 잊고 킬킬 웃었다. 몸이 안 움직이는 상황임에도 이제는 무섭지 않았다. 왠지 저 녀석은 호은당에는 절대 들어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상황을... 즐기려고 했다. 그래. 즐기자.


 “겁쟁이 자식! 나한테 질까 봐 겁나서 그렇지? 소심하고 찌질한 루저 새끼. 나한테 처발리고 세연이가 너 경멸스럽게 보는 게 두려운 거지? 세연이한테 버림받을까 봐 겁나지? 찐따 새끼. 남자라는 놈이 그렇게 소심해서 뭐해? 왜 사냐? 불알은 왜 달고 있어? 그거 떼. 등신아!”


 그렇게 입만 산 새끼 중에서 옳은 놈 못 봤다. 그리고 그 정도 욕은 난 웃으면서 넘길 수 있거든. 네가 귀족 나부랭이들 못 만나봐서 그래. 그 사람들이 입 떼면 네놈 멘털은 아주아주 고옵게 갈려서 바람에 산산이 흩어질 거다. 난 그런 사람들 앞에서 몇 달을 보냈어. 그 정도 가지고는 꿈쩍 안 하거든. 병신. 욕도 할 줄 모르는 귀신 새끼. 넌 중학생이 게임할 때 하는 욕만 들어도 바지에 오줌 싸고 도망갈 거다. 훠이. 가, 인마. 엉아가 곱게 보내줄 때 꺼져. 뭔... 지랄을 해도 여기 와서 지랄이야. 가, 인마. 엉아 단잠 방해하지 말고.


 겁이 없었다.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진짜... 우습게도 귀신을 놀리고 있었다. 겁도 없이, 엄청난 집념을 가졌다는 그 귀신을 그렇게나 놀려대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것은 잠에서 깨어난 뒤였다. 대문 너머에서 길길이 날뛰는 놈의 목소리 사이로 전화벨이 울린 덕분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요란한 내 벨소리 외에는 에어컨 바람 나오는 소리뿐이었다. 대문을 흔드는 소리 따위 전혀 없었다. 바람조차 대문을 흔들지 못했다. 무시무시하게 조용했다.


 “어, 연화야.”


 -이 아빠 미쳤나 봐! 뭐 하는 거야?


 얘는 다짜고짜 전화해서 왜 멀쩡한 사람을 미친놈 만들어? 내가 뭐라 대꾸도 하기 전에 연화는 깔깔 웃었다.


 -진짜, 아빠 대단하다. 아빠한테 왔지? 그거.


 아. 그거. 아까 그거 말하는구나. 나는 긴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 그래도 어디 있나 했네. 시간 끌어줘서 고마워. 바로 따라왔으면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재미있네, 재미있어. 대문 열지 마. 빗장 잘 걸어 놔. 은미 언니가 오늘은 문 안 열어도 된다고 했으니까 심심하거든 낮잠 자면서 그놈 불러서 놀아. 어차피 호은당 안에는 못 들어가니까. 약이나 살살 올리고 놀아. 제 풀에 지쳐 떨어지면 우리도 좋고. 아. 역시. 우리 아빠 최고다. 아하하!


 뚝. 얘는 꼭... 지 할 말만 하고 끊더라. 나는 대답 한 번 못 했는데. 이럴 거면 무전기를 쓰지. 나는 바탕화면으로 돌아온 전화기를 내려놓고 에어컨을 껐다. 꽤 많이 잤다. 대문을 열고 오늘은 쉽니다.라는 팻말을 걸어두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문이 닫혀있으면 안 온다. 그리고 일단 연화가 대문 열지 말라고 했으니까. 열었다가 그놈이 들어오면 어떡해? 어우.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슬그머니 상담실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조용했다. 아주 적막했다. 대문은 여전히 우직하게 닫혀 있었다.

 음... 진짜 꿈인가. 내다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 차통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뭘 마셔볼까. 이것도 꽤 재미있는 놀이다. 두려움은 잠시 꾹꾹 눌러두기로 했다.

 나는 하루를 정말... 정말 지루하게 보냈다! 차를 이것저것 우려 맛을 보는 것이 재미는 있지만, 파는 것도 아닌데 허투루 우리는 것은 낭비다. 두어 가지 우려 하루 종일 두고두고 마시면서 재탕, 삼탕도 해 보고, 요리 명인이라는 유명인의 너튜브를 보며 레시피 메모도 했다. 괜히 상담실의 책들도 이것저것 살펴보았고,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게임도 했다. 잔디밭에 홀로 삐죽 솟은 잡초들도 정리했고, 장독대 주변과 텃밭도 손질했다.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는데 시간은 아직도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았다.


 “아. 더워. 개 더워.”


 나는 상담실로 비척비척 들어가 에어컨을 켜고 누웠다. 아. 시원해라. 방석을 도르르 말고 눕자, 아침에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또 자면 꿈에 그놈이 나올까? 사실 재미도 있었지만 무서웠다. 정말 무서웠다. 꿈에서 깨고는 대문 근처에 가는 것도 두려웠으니까.

 연화가 깔깔거리며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를 해도, 놈이 이 안으로 못 들어온다고 해도, 무서웠다. 제일 무서운 건 놈이 아니라 내 몸이었다. 내 몸이 내 말을 듣지 않는 그 기괴한 현상은, 두 번 겪고 싶지 않았다. 수십 년을 가위에 눌리며 산다는 사람도 있던데.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나라면 진작 심장마비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정체 모를 놈도 놈이지만, 가위가 더 무섭다. 나는 시원한 바닥에 누워 잠들지 않으려고 애썼다. 딱 낮잠 자기 좋은 시간인데.


 아무래도 잠들 것 같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다시 바쁘게 돌아다녔다. 사랑채의 내 방도 정리하고 건넛방의 약술과 효소 병들도 다 닦았다. 주방 냉장고도 청소하고 상담실의 책들도 종류별로 차곡차곡 정리했다. 한참을 움직이다 보니 배가 고팠다. 그러고 보니, 나 오늘 점심에 라면 하나 먹은 게 전부구나. 냉동실을 뒤져 지난번에 사두었던 오징어를 꺼내 매콤하게 볶아 오징어덮밥을 해 먹고, 은미 씨와 연화가 먹을 것도 더 만들어 두었다. 오늘 오긴 오겠지? 안 오면... 좀 무서운데. 어둑해진 마당에 불을 밝히며 나는 오늘따라 으스스해 보이는 보리수나무에게 등을 돌렸다. 쟤는 낮에 보면 예쁜데 밤에 보면 진짜 무섭더라.


 다행히도 은미 씨는 늦은 밤이 되어서 돌아왔다. 수수한 차림새의 연화도 함께 말이다. 오자마자 한다는 말은 역시나 배고파! 였다. 나는 미리 해 두었던 오징어 볶음을 데워 맛깔난 덮밥을 만들어 주었다. 두 사람은 아주 맛있게 그릇을 비웠다. 그들이 늦은 저녁을 다 먹을 때까지, 나는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았지만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식사가 끝나면 분명 이야기해 줄 테니까 말이다. 늘 그랬듯이.



 세연 씨는 본가로 돌아갔다고 한다. 한 번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 좀 더 두고 봐야 하지만, 이제부터는 연화의 몫이 되었단다. 연화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시큰둥했다. 어쨌거나 다시는 그 이상한 놈이 호은당에 오거나 내 꿈에 올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은미 씨는 혹시 또 모른다며 빨간 술을 단 장신구 하나를 사랑채 문 위에 걸어 주었다. 이건 뭐냐고 물었더니, 귀신 쫓는 향이라고 했다. 와. 진짜 귀신이 맞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은미 씨와 연화를 통해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으니 느낌이 묘했다. 당분간 여자는 호은당이 아닌 연화의 법당으로 갈 거고, 연화는 그 여자 때문에 바빠질 거라며 도시락을 배달해 달라고 징징거렸다. 나는 당장 휴대폰을 꺼내 도시락 배달 업체 연락처를 검색했다. 연화는 잔뜩 삐쳐서 가버렸다.

 연화의 법당에 매일 가는 건 어렵겠지만, 간식이나 찬거리 몇 가지만이라도 만들어서 가끔 가져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은미 씨도 좋은 생각이라며 고마워했다. 뭘요. 이제 노비 생활도 익숙하고 저 꼬맹이 아빠 노릇도 자연스러운데. 이 정도쯤이야. 그리고 연화는 매달 내게 밥값이라며 100만 원씩 꼬박꼬박 주고 있다. 공돈을 그만큼이나 받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사기꾼 패거리에 끼이고 말았지만, 적어도 양심은 있으니까.

 연화가 좋아하는 게... 이 녀석은 날 음식을 너무 좋아해서 문제다. 내일은 회덮밥이라도 만들어서 퀵서비스로 보내야겠다.

 사연 많은 귀신 사건은 한바탕 소란이 되어 오늘의 뒤로 넘겨졌다.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듣고 싶지도 않았고. 세연 씨가 빨리 평온을 되찾길 바랄 뿐이다.



 호은당에 오는 손님들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내가 보기엔 별 것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한 일도 있다. 이번 일처럼 소름 끼치는 일도 있지만 결국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기도 하다. 처음엔 공감도 하고 이해도 하고 나름대로 노력을 해 보려고 했지만 요즘은 그러지 않는다. 그저 멀찍이 서서 방관자의 자세로 이야기를 듣고 그렇구나. 하고 만다. 깊게 생각하면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기에 나는 그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호은당에서 일한 지 6개월. 나는 조금 변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게 됐고, 그 이야기에 내 생각을 담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어찌 보면 참 메말라버렸다, 그런 느낌이 든다. 공감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았다. 전에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고 공감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게 된 요즘, 나는 내 마음이 조금 더 편안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공감하고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으니 감정 소비도 줄었다. 같이 화낼 일도, 같이 슬퍼할 일도 없었다. 그냥, 그렇구나. 네가 화가 났구나. 혹은 네가 슬프구나. 그것이 전부였다. 너는 화가 났고, 나는 그걸 안다. 그 정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굳이 그들의 감정을 공유해야 할 이유가 없을 뿐, 그들의 감정이 어떤지는 안다. 그들이 내게 하소연하고 털어놓고 떠드는 건, 단지 그렇게 할 상대가 필요해서 그럴 뿐이니까. 나는 그저 묵묵히 들어주기만 한다. 그들의 감정에 함께 휩쓸릴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들어주고 나면 그들은 다 똑같은 말을 한다. 도움이 되었다고. 상담해 줘서 고맙다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듣기만 했는데.

 그들은 그저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고, 나는 그들의 대나무 숲이 되어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공감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는 지금의 내 마음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같이 욕해주지 않아도, 같이 슬퍼하지 않아도, 같이 기뻐하지 않아도. 그들의 말을 끝까지 묵묵히 들어주고 빙긋 웃어주는 것 하나만으로, 조용히 약과 하나 더 갖다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위안이 되었다. 나는 어느새 호은당의 상담사가 되어 있었다. 공감도, 이해도 하지 않는 목석같은 사람이 된 것 같았지만,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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