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4-흉가 체험, 그 후(E)>
흉가에 다녀와 귀신 씐 남자가 돌아간 지 이틀이 지났다. 내 몸의 근육들이 아직도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만 빼면 우리는 모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연화는 여전
히 날라리 꼴을 하고 내 잔소리를 피해 도망 다녔고, 우민이는 여전히 은동이와 함께 말라가는 잔디밭을 뒹굴었다. 은미 씨는 여전히 싸늘한 눈으로 은동이에게 시비를 걸었고, 나는 여전히 이들의 밥을 차려 주고, 예약 일정을 조정하고, 손님을 받고, 차를 우리고, 다과를 내고, 계산을 하고... 아, 좀! 일 좀 해라! 나만 일 하냐!!
가을이 높아졌다. 하늘이 성큼 멀어졌다. 바람은 상쾌했고 한낮의 햇살도 이제는 뜨겁지 않았다. 따뜻한 차가 어색하지 않은 날이 하루하루 짙어지고 있다.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가 한산해진 이른 저녁 무렵, 우리는 마당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둘러앉았다. 오랜만에 모두가 모여 찻잔을 들었다. 우민이는 잽싸게 달려가 대문을 걸었다. 은미 씨는 흡족한 듯 웃었다.
“아빠, 일찍 문 닫은 기념으로 회식하자!”
“너, 내 월급날은 기똥차게 기억하지? 내 생일은 아냐?”
“아빠 생일을 내가 왜? 애인 생기면 기억해 달라고 해.”
“... 내가 말을 말지. 뭐 먹으러 갈래?”
“돼지껍데기!”
“치킨!”
“조개구이!”
메뉴 선정부터 차암... 합이 안 맞는 식구들이다. 이런 사람들과 일하고 살고 있다니. 나도 참 대단하지.
나는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찻잔을 들어 호로록 마셨다. 음. 향 좋다. 예전에는 이런 밍밍한 맹물을 왜 먹나, 했다. 현미차나 보리차 같은 것들은 고소한 맛이라도 나지, 이런 향만 좋은 차들은 무슨 맛으로 먹나 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차는 향을 마시는 거다. 잔에 담긴 맑은 수색을 마시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향을 마시고,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차를 마시는 거다. 뭐, 물론 그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차는, 맑고 아름다운 색으로 머리를 쉬게 하고, 차분하고 고아한 향기로 마음을 편하게 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찻물로 몸을 편하게 하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차는, 여유다. 절친한 이들과 함께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시간. 차는 나의 여유로운 시간이다. 그래. 그렇다. 나의 금쪽같은 여가 시간이 바로 이 차 한 잔이다.
“그럼 치킨 먹고 껍데기 먹고 조개구이!”
“아냐, 누나! 껍데기 집이 더 가까워!”
“첫판부터 느끼한 게 들어가? 담백하게 조개구이 먹고 시작하자.”
그 여가 시간에 보고 듣는 것이 이런 것만 아니라면 차암 좋겠는데... 내 주제에 여유는 무슨. 언제쯤 느긋하게 차 한 잔 마셔보나. 내 팔자에 쉬는 시간은 없는 건가. 가련한 인간. 어쩌다 이런 녀석들 아빠가 된 건지. 장가도 안 간, 아직 새파랗게 젊은 총각인데. 에휴. 불쌍한 내 팔자야.
“하나만 먹자, 하나만. 뭐 식당 상대로 도장 깨기 해? 오늘 아니면 날이 없는 것도 아니고. 가위바위보 해! 가위바위보 해서 이기는 순서대로 하나씩 매일 가면 되잖아.”
세 사람은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역사상 가장 살벌한 가위바위보 열 판을 벌였다. 와, 어지간한 전쟁도 이것보다는 덜 무섭겠네. 살벌하다, 진짜 살 떨린다.
결국 이긴 순서대로 은미 씨, 우민이, 연화가 고른 식당을 각각 차례대로 가기로 했다.
“그럼 조개구이 먹고 껍데기 먹고 치킨 먹고 오면 되겠다.”
응? 하루에 하나씩 가는 거 아니었어?! 오늘 다 간다고?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지만, 세 사람은 당연히 그러는 거 아니냐는 듯 나를 보았다. 이 속에 있으면 내가 외계인이 된다. 어디서 읽은 적이 있는데, 외눈 원숭이 무리에 두 눈 원숭이가 끼면, 두 눈 원숭이가 이상한 거라고. 지극히 정상적인 건 난데, 왜 여기 있으면 내가 비정상이 되는 걸까. 나는 대식가 무리에 떨어진 소식가였다. 그래서 나는... 비정상인 거다. 하하하...
동네 끝자락에 있는 조개구이집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사장님이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가는 집마다 단골이 된다. 우민이의 엄청난 친화력과 은동이의 얌전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먹는 양이 어마어마한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우리는 은동이를 배려해 식당 앞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모! 우리 조개구이 큰 거, 두 개 한 번에 내주세요!”
우민이의 신들린 주문이 시작됐다. 굽는 시간과 주문한 메뉴가 나오는 시간을 정확히 맞춰서 주문하는 것은 우민이 만의 특별한 스킬 같은 거였다. 기똥차게 잘 맞췄다. 덕분에 나는 쉬지도 못하고 구워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다.
오늘도 역시 정신없이 조개를 굽고 있는데 우민이가 툭툭 쳤다. 아, 왜? 바쁜데.
“혀, 형... 저 뉴스...”
우민이가 멍한 눈으로 내 등 뒤를 가리켰다. 나는 힐끔 곁눈으로 살폈다가 깜짝 놀랐다. 다시 고개를 돌려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낯익은 자동차와 주택이 보였다. 몇 번을 보아도 내 기억 속의 그 집이다.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인해 일가족 세 명 모두 사망했다는 내용의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터뷰하는 이웃은, 최근 그 집에서 고성과 비명이 잦았고 이웃에 돈을 빌려 달라는 말도 많이 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웃의 증언을 토대로, 금전 문제로 인해 일가족이 동반 자살한 것으로 종결한다고 했다.
은미 씨가 젓가락을 탁 놓았다.
“... 나약한 것들.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어.”
은미 씨는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어 냉큼 비워버렸다. 나는 잘 익은 가리비 한 점을 골라 앞에 놓아주었다. 은미 씨는 굳은 얼굴로 질겅질겅 조갯살을 씹었다.
“오늘은 술 좀 마셔야겠다. 연화야, 자고 가.”
“어머? 아빠가 어쩐 일이래? 나야 좋지! 언니이! 여기 소주 한 병 추가!”
종종 이렇게 끝이 허무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소식을 접했을 때의 은미 씨는... 아파 보였다. 누구보다 마음이 아파 보였다. 지금도 그녀는 피가 철철 흐르는 가슴을 하고 있다. 이럴 때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더 속상했다. 그녀가 이렇게 아파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날, 함께 고생했던 나도 이렇게 마음이 쓰라린데.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못했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 그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저마다의 아픔을 가릴 뿐이었다. 연화는 조용한 전화기만 만지작거렸고 우민이는 무릎 위에 턱을 올리고 있는 은동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조갯살만 뒤적거리며 구웠고 은미 씨는 동그란 철판 위에서 노릇하게 굽힌 옥수수 알 하나하나를 깨작거릴 뿐이었다.
“한 잔 합시다. 우리 모두... 수고했으니까.”
나는 투명한 술이 찰랑거리는 잔을 들고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