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수 없는 생과 사

by ㄹㄴ

캐나다, 네덜란드, 스페인 ... 안락사가 합법인 나라가 있다고 하더라도 많은 죽음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난다.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이 대체로 회복 불가능한 환자라는 점을 상기시키면 더욱 그러하다. 생이 충분히 즐겁고 건강하고 다채롭다면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태어나고 죽는 것, 그것은 선택할 수 없는 일들, 자유의지와 무관한 것들이다.


이에 대한 인식이 보편화 되기 시작한 후부터인지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을 권장하는 운동 '웰다잉' 캠페인이 20세기 이후 등장했고, 지금도 '잘 죽기위한 사전 작업'에 대한 중요성은 대체로 공감을 산다. 하지만 그러한 준비 시간도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아프게 될 지는 알 수 없다. 대충 100세 시대라고 하니 90세부터 준비하면 되는 건지, 그래도 언제 큰 병이 엄습할 지 모르니 더 일찍 팔팔한 육십대 때부터 장기 계획을 세워야 하는 건지 결정하기도 실천하기도 쉽지 않다. 또 웰다잉에 속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잘 죽는다는 게' 도대체 뭔지부터 (나만의) 정의를 세워야한다.


잘 죽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다. 잘 죽는다는 건 내가 언제쯤 세상을 떠날 거란 걸 어림 짐작하여 그 날까지 버킷리스트를 세우고 하나씩 실천해 보는 것, 남은 사람들에게 못다한 말들을 미리 전하는 것, 내가 가진 유무형의 재산들을 어찌 처리하면 좋을지 정리하여 놓는 것... 정도가 될까. 그 조차도 못하고 이승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이 이상의 할 일을 적는 건 욕심일까 생각한다.




이모부는 너무 갑작스럽게 떠나셨다. 이모는 간병할 시간이 일년 정도 주어졌으니까, 그리고 그 기간동안 아낌없이 살폈고 그 기간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매매 인사를 나눴으니까 그렇게 갑자기는 아닌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신다. 그렇지만 이모부 자신에게는 어떠한 준비조차 할 수 없이 닥쳐버린 시련이었다. 또 자주 뵐 수 없었던 나에게도, 이모부의 수술과 침상생활은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의사는 수술하면 일년 육개월, 수술하지 않으면 육개월이라고 시한부 판정을 내렸다. 이모부를 사랑하는 가족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단지 조금 어지러웠을 뿐인데, 면역이 떨어져 피로감이 더했을 뿐인데, 가벼운 병이겠거니 치료하면 낫겠거니 생각했지만, 의사는 뇌종양 판정을 내렸다.


수술을 하고 나서 이모부는 급격히 쇄약해졌다. 운동신경을 관장하는 뇌부분에 종양이 생겨 수술 후에는 스스로 움직이실 수가 없었다. 그에게 허락된 움직임은 눈동자를 굴리는 것 뿐이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 우리는 감사하다고 기도했다. 그가 슬픈지 놀랐는지 화가 났는지 피곤한지 알 수 있으니까,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으면 손가락 정도는 스스로 제어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나는 외가 집안의 막내 중 막내였다. 엄마는 일곱남매 중 막내였고 나는 두 남매 중 막내였다. 이모들은 결혼을 빨리 하셨고, 우리 엄마는 상대적으로 뒤에 세대라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까지 잡은 후에 결혼을 하셨다. 그래, 나는 사촌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컸다. 평생을 막내둥이로 자라면서 어리광이 많았고 그렇게 아가로만 대하시니 어른들에게 어른이 되면 하는 일들 그러니까 술을 마실 줄 안다거나 결혼을 준비 중이라거나 이런 일들을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엄청난 용기를 내어야만 가능한 말들과 행동이었다. 그렇게 이모부에게도 직접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리지 못했다. 이모부를 떠올리면 가장 후회되고 부분이다. 아직도 죄송한 마음이다.


이모부는 다 듣고 계셨다. 나의 결혼 소식을. 엄마와 이모가 나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걸 들으시고는 놀란 표정을 하셨고 나를 쳐다보셨지만, 나는 웃기만 할 뿐... 이모부의 손을 잡고 애꿎게 마사지만 할 뿐, "이모부 저 결혼해요"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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