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만 싸한 말

by ㄹㄴ

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누구나 거슬리는 말투 또는 목소리, 억양 등이 아니라 '말의 내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말속에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보인다. 너무 거창한가? 그 사람의 사상, 바깥을 대하는 태도가 보인다. 가끔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이 크게 불편하다. 남들이 그런 식으로 말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친구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전 직장에서 동료를 놀리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관점에 따라서는 유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놀림이긴 했다. 물론 누군가는 그 상황이 불편할 수도 있었다. 놀리는 것도 사람을 봐가면서 하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그 직장 동료는 그런 '편'이었다. 불편할 듯 말 듯 재밌는 듯 아닌 듯 애매하게 선을 넘을 듯 말 듯한 정도의 놀림이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녀의 농담을 좋아했다. 그리고 거기에 익숙해진 몇 동료들은 잘 받아치는 기술이 생겼다. 잘 어울려 노는 걸로 보였다. 나는 그 모호한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느끼면서도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애써 섞여 있었다. 어떨 땐 놀림을 당하는 사람보다 내가 더 언짢은 기분이 든 것 같아, 스스로가 오버스럽다고 느꼈다. 그녀의 싸함을 아무도 감각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 말이다.


어느 날은 팀원 전체가 가까운 곳으로 출장을 떠났다. 이동하는 인원이 많아 지하철을 이용했다. 하필 며칠 전에 지하철 흉기 난동 사건이 있었다. 괜스런 두려움을 안고 출장지로 가는 중에 역시 대화 주제는 당시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이렇게 지하철이 만석인데, 흉기 난동범이 나타나면 도망칠 곳도 없어서 어째요. 상상만 해도 무섭다." 누군가 말했다. "문이 열리는 즉시 냅다 도망쳐야지 뭐." "신고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뭐 대충 이런 말들이 오갔던 것 같다. 주고받은 대화가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도 내 머릿속에 이 장면이 강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그녀의 말 때문이었다.


"나는 옆에 있는 사람을 칼 든 사람한테 던지고 도망갈 거야."

크게 당황한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그녀의 말은 내게 너무 끔찍한데, 내가 너무 상상력이 풍부한 걸까?


기회가 닿아 서울역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됐다. 근래 서울역 주변에 맛집이 많이 생겼는데 잘 됐다며 다들 들떠 있었다. 골목골목을 지나 큰길로 들어서자 비스트로가 줄 지어 있었다. 멀지 않게 역사 입구가 보일 때 즈음 목표한 장소에 도달했는데, 그녀가 말했다. "근데 사실 난 서울역이 좀 무서워요. 여기 올 때마다 겁나 뛰어다녀, 노숙자들 마주치기 싫어서. 으~ 무서워."


젊은 여성, 밤길, 서울역을 떠올리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일까? 하지만 때는 희멀건 대낮이었다. 그녀의 말이 뇌리에 박혀 가시질 않았다. 노숙자... 그들의 겉모습이 심하게 낯선 게 맞고 매스컴이 그리는 그들의 이미지가 불쾌감을 심어줄 수는 있으나, 다들 '사람'이잖나. 사연이 꽁꽁 숨겨진 그저 사람.


또 나만 느낀 건가? 그녀의 싸함을. 답답한 마음을 친구에게 토로하니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속으로만 생각하는 걸 입 밖으로 꺼낸 철없는 여자라고 결론을 내려줬다. 친구의 말대로 그저 철없는 사람이라면 다행인 건데, 왜 난 안심이 되지 않는 걸까? 그건 나를 향한 아쉬움이면서 동시에 그 순간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싸한 그녀가 인기가 많다는 사실은 나를 거북하게 한다. 정말 내가 오버스러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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