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에서 산맥까지 Ep. 1
안개가 자욱이 내려앉은 산맥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해가 아직 밝지 않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은 벌써 불 앞으로 모여들었다. 다들 졸린 눈을 비비며 끓는 커피물만 힐끔힐끔 쳐다볼 뿐 소담을 나누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서로의 시선을 안개 속으로 숨겼다. 그들 사이에서는 유일한 아시아인 수정도 섞여있었다. 그녀는 콜롬비아 북쪽에 위치한 열대아 산맥에서의 눈에 띄는 이방인이었다. 콕 집어서 어디가 다르다 할 수 없지만 그녀가 외부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은 곁눈 질로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흔들리는 갈색빛 눈동자가 이 사실을 더 요란스럽게 소문내고 다니는듯했다.
“Quires tinto?” 산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셔츠와 갈색 작업복 바지에 긴 검은색 고무장화를 신은 Jose가 커피 한잔을 수정에게 건넸다.
“Si, gracias.” 새벽에만 나올 수 있는 특유의 웃음으로 수정은 커피를 건네받으며 페인트가 거의 벗겨진 플라스틱 컵의 온기를 양손으로 감싸 안았다. 얕은 커피에 설탕이 듬뿍 들어갔기에 단맛만 진동하는 한 모금을 홀짝 마셨다. 수정은 커피의 중독성에 의지하고 싶지 않은 고집이 있어 평소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마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정에게 이방인이라는 신분은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유년시절부터 여러 나라를 거쳐가며 새로운 환경이 주는 흥분감을 즐겼고 새로운 얼굴이라 받는 관심도 좋아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오래된 친구와 인연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우리 안에서 주는 안정감과 소속감을 비밀리에 갈망하였다. 20대가 된 후로 질문 없는 답을 찾으려 도시와 숲 사이를 방황하는 도중 이곳 남아메리카 대륙의 최북단인 Sierra Nevada de Santa Marta 산맥까지 오게 되었다.
캐라비안해를 마주 보는 Sierra Nevada 산맥은 열대·아열대 습윤 활엽수림 삼림 생물 군계 속하며 흔히 말하는 정글이다. 해발 5700m까지 올라가는 이 정글 산맥은 세계 열대지방에서 가장 높은 해안 산맥이다. 그야말로 산, 바다, 그리고 정글 열기가 최고조로 다 달은 체 진득하게 섞이고 섞인 지점이다. 또한 Sierra Nevada는 스페인인어로 눈이 덮인 산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뜨거운 열대야 태양 밑에서 산꼭대기에 덮인 새하얀 눈을 바라볼 때면 자연의 미묘하고 신비로운 형태 없는 그 무언가에 사로잡힌다. 특히 짠 바닷물에서 헤엄치며 이 절경(絶景)을 바라볼 때면 시끄럽게 지저귀는 잔 생각들도 한순간에 녹아 사라진다. 그 순간만큼은 외부에 다른 어떤 것도 산맥의 성스러움에 관섭할 수 없다. 산 정상에 내려앉은 눈은 35개의 강으로 다시 태어나 수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며 오랜 전통을 가진 다섯 원주민 부족의 젖줄이 되어주었다.
커피를 거의 다 마신 수정은 산맥 사이로 흐르는 구름과 안개가 섞인 연기를 잠시 응시하였다. 그 틈새로 어젯밤 꿈에서 본 장면들이 생생하게 보이는듯했다. 자연에서 취하는 잠자리의 꿈은 항상 더 뚜렷하고 현실세계와의 경계선은 더욱 불분명하다. 꿈속에서는 산맥 정상에 뾰족하게 솟아난 봉우리들 사이에 자리 잡은 신비로운 호수가 보였다. 호수 안에서부터 연기가 피어 나오는 듯했고 신성한 용의 궁전이 밑에 잠겨있을 것만큼 깊이가 있어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호수 안에 무언가가 움직였다. 자세히 보려고 할수록 더욱더 희미해졌지만 붉은 용과 푸른 용의 그림자가 빛을 반사하는 물결에 굴절된 채 보였다가 사라졌다 이 호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런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우주의 완전한 순수함과 신비로움의 결정체였다.
“Vamos.”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소리에 수정은 꿈 생각에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들 하나둘씩 마세티 (긴 정글 칼)을 벨트에 차고 가방을 메었다. 어제 보지 못한 곳을 가려면 오늘도 하루 종일 “Loma Linda”을 걸어야 한다. La Guajira 지역의 조그만 해변가 마을 팔로미노에서 4시간 등산해서 도착한 “Loma Linda”는 아름다운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끝없이 펼쳐진 숲이다.
우리는 이곳을 사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