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천주교에는 그런 말이 있다. 첫 영성체 때 빈 소원은 무조건 이루어진다고. 어떤 소원이라도 그 소원만은 하느님이 반드시 이루어주신다고. 당시의 나는 꼭 이루고픈 소원이 있었다.
첫 영성체에 들뜨고 정신이 없다가도 나는 기도했다. 하얀 미사포를 쓰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 어린 나는 간절히 빌었다. 나의 소중한 소원을. 나의 단 하나뿐이었던 소원을. 그 간절했던 나의 소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루어졌을까?
아니, 나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1살의 내가 빈 소원은 단순했다.
"아빠를 낫게 해 주세요."
일곱 살에 신앙을 갖게 된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열세 살까지 내가 빈 소원은 하나였다. 나는 그 하나만 빌었다. 하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빠가 돌아가신 그때,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내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내 소원에 대해 생각할 정신도 없었다. 문제는 이후에 있던 교리 시간이었다. 그날의 교리는 이제 중학생이 되니 소원을 써보라는 것이었다. 내 소원은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쓸 것이 없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으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교리 교사 선생님이 발표시킨다고 하셔서 그제야 옆의 친구의 소원을 보고 베꼈다. 우습지 않은가.
소원이 없는 14살.
신께 빌 것이 없는 어린 신앙인.
쓸 소원이 없어 남의 소원을 베끼는 청소년.
그때부터 나는 소원을 빌지 않는다. 신께 기도하지 않는다.
사실은 아직도 신을 깊이 원망한다.
'한 말씀만 하소서'는 작가 박완서가 아들을 잃은 1988년 당시에 쓴 일기를 정리한 책이다. 당시 작가는 처절한 고통과 신에 대한 원망을 가감 없이 써 내려갔다. 작가 자신이 어떤 고통을 겪고 그 고통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서술한다. 아니, 증언한다. 아들이 죽었는데 멀쩡하게 밥을 먹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동시에 밥을 먹지 않는 자신을 걱정하는 딸에게 미안하고 자신의 고통을 아는 척도 하지 않으면 서운하다.
책을 읽으며 어린 '나'가 겹쳐졌다. 13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신을 믿었던 어린 내가 떠올랐다. 아는 사람이 하는 가벼운 위로가 원망스럽고, 그렇다고 모르는 척, 위로도 안 해주면 서러웠던 나. 내 작은 소원 하나도 이뤄주지 않은 신을 원망하면서도, 장례식장에 온 성당 사람들의 위로에 기대었던 나. 혼자 있고 싶었지만, 누군가의 온기가 간절했던 나.
그토록 모순적이고 이해할 수 없었던 나.
그 책은 그런 '나'에 대한 해설서 같았다.
박완서 작가는 신을 향해 따져 묻는다.
왜 하필 나냐고.
왜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느냐고.
나도 따져 묻고 싶었다. 왜 하필 나였냐고. 다들 부모님이 있는 게 당연한데, 그 당연한 것이 왜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냐고.
책은 이렇게 답한다.
'왜 당신이라고 그런 일을 당하면 안 되는가?'
박완서 작가는 한 수녀님이 던진 이 반문에서 최초의 균열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는 저 문장을 이해할 수 없다. 아직도 '나라고 그런 일을 안 당할 순 없지.'라는 이해보다는 '왜 하필 나만.'이라는 원망이 앞선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기도하지 않는다.
신 앞에 서면서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신을 어렴풋이 믿으면서도, 신에게 기대지는 않는다.
언젠가 더 성숙해지면 저 문장을 이해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은 아니다.
만약 내가 저 문장을 온전히 이해하는 날이 온다면, 그날에야 나는 신 앞에 부복할 것이다.
내 고통을 핑계로, 침묵하는 당신을 원망했다고.
신, 당신의 존재의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다. 한 번도 목소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있는 것처럼 느끼고, 부르고, 매달리게 하는 그 이상하고 음흉한 힘이다.
—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p.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