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하태평 Sep 18. 2019

가난함을 감사하는 기도



돈이 적어 가난함에 감사합니다. 여윳돈을 어떻게 쓸까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혹시라도 빼앗길까 사라질까 조바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 역시 좋습니다. 약간의 돈만 생겨도 기쁘고 든든해집니다. 어쩌다 예상치 않은 공돈이라도 들어오면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신이 납니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친구가 적어 가난함에 감사합니다. 하루 종일 전화를 걸거나 받아야 할 상대가 별로 없으니 한가해서 좋습니다. 어쩌다가 전화 한 통이라도 오면 떠나간 애인 돌아온 듯 반가우니 그것도 좋습니다. 마음에는 항상 그리움이 저금되어 있어서, 문득 떠오르면 전화할 여유가 있으니 감사합니다. 굳이 전화번호를 뒤적이는 수고가 필요 없습니다.


일이 없어 한가함에 감사합니다. 사는 것이 의무가 아니듯 일도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먹고살기 위해 억지로 일하지 않는 것에 감사합니다. 차라리 적게 먹겠습니다. 삼시 세 끼가 안된다면 두 끼로 살겠습니다. 

진실은 한가함 너머에 있습니다. 고통을 지나면 쾌락의 시간이 있고, 쾌락의 시간을 잘 보내면 한가함의 세계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 한가함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를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이 나타납니다. 당신을 만나는 시간, 하나님의 공간이 거기에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가난합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원하는 것이 없으므로 굳이 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갖고 싶은 것이 없으므로 애써 노력할 일도 없습니다. 지금 사는 작은 집에 감사합니다. 비록 잠시 빌려 사는 집이지만 우리 세 식구 잘 지내니 부족함이 없습니다. 각자 떨어져 있어도, 작은 기침소리 움직이는 소리도 다 들을 수 있습니다. 무얼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보지 않아도 다 느껴집니다. ‘우리는 하나’라는 평범한 진리를 매 순간 확인합니다. 가난한 덕분입니다.


가난하여 내 것이 없으니 별다른 집착이 없게 됩니다. 점점 욕심이 사라지고 조바심이 사라지고 질투와 분노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점점 좋아지기 시작합니다. 나의 한가한 시간이 좋고, 가까이 있는 가족이 좋고, 멀리서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들이 좋고, 각자 자신의 세계를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대견해집니다. 

그것을 나의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비로소 세상의 진짜 주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렴풋하게나마 당신,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존재를 느낍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내 것은 없습니다. 당신 하나님이 만든 세계를 한껏 갖고 누리는 은혜의 시간을 가졌을 뿐입니다. 당신께 감사합니다!


지금의 한가한 즐거움이 내 것이 아니듯 강렬한 기쁨의 순간도 내 것이 아닙니다. 지독한 고통과 아픔의 시간이 찾아온대도, 그 역시 내 것이 아닌 것이지요. 당신이 주신 선물로 기쁘게 받겠습니다. 아무리 독한 아픔도 이내 사라지는 연기 같은 것 아닌가요? 오직 당신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실재임을 믿습니다.


아! 마음이 가난하니 눈과 귀가 밝아집니다. 밝은 달이 더 맑게 보이고 근처 새소리도 흥겹습니다. 달려가는 꼬마 아이의 발그레한 볼만 봐도 기쁨 만렙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즐겁습니다. 내 것을 주장하지 않아도 두렵지 않으니 이제는 남을 위해서 뭔가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내 것이 없으면 다른 사람 것이 내 것이 됩니다. 세상의 행복이 나의 행복인 것이지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든 세상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으니 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잠시 머물러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시간을 가질 뿐입니다. 당신의 은총에 감사하며 미숙하나마 노래를 만들어 바칩니다.


                 파도의 변명


   내가 이렇게 열심히 부서져 가는 것은

   다정한 모래사장이 부러워서가 아니어요

   박력 있는 바위해변이 좋아서도 아니어요


   내가 이렇게 한껏 몸을 일으켜

   당신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것은

   결코 당신이 싫어져서가 아니어요


   당신은 바다 나는 파도

   내가 이렇게 한껏 모양을 뽐내며 나를 주장하는 것은

   빨리 당신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치명적으로 부서져 당신 속으로 스며들기 위해서


   나는 파도 당신은 바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당신에게 항복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나는 당신의 바다에서 잠깐 일어난 파도일 뿐입니다. 한때는 그럴듯한 파도의 일렁임이 나라고 착각한 때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더욱 멋지고 왕성한 모양을 만들려고 애썼던 적도 있었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 파도의 일어나고 부서짐이 모두 당신의 뜻 안에서, 당신의 보살핌으로 진행되었음을 믿습니다.


당신의 바다에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위력적인 태풍도 있고, 휘몰아치는 해류도 있고, 한없이 평화롭게 잠든 바다도 있겠지요. 굳이 나에게 아름다운 순간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폭풍의 시련이 온대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 괴로움을 내 것으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항복하였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생에게 7; 겸손은 힘들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