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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Sep 17. 2019

동생에게 7; 겸손은 힘들어


“고난의 주간이 시작됐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언니가 한 말이야. 대한민국의 대다수 며느리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명절 음식을 마련해야 하고, 만들고 차리고 치우는 일 대부분을 여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게 현실이니까.


몰매 맞을 소리가 분명하지만 말할게. 나는 명절이 좋아. 먹을 것 넉넉하고, 함께 모여서 수다도 떨고 웃고 즐기고... 어머니가 “음식 먹이고 싸서 보내는 재미”로 명절 지낸다고 하시는 그 마음, 그걸 그대로 받는 재미가 나는 좋아. 문제는 누군가는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거. 그리고 그 일은 대부분 여자들, 그중에서도 며느리들에게 강요된다는 게 문제지.


“한 상 차려놓고 가라.”


추석날 친정으로 가려는 너에게 시어머니가 너에게 하신 말. 아직 오지 않은 당신의 딸을 위해 밥상을 준비해놓고 가라는 말씀이지.


“네?”


뜻밖의 말씀에 놀란 너는 말을 잊었고, 옆에 있던 너의 남편이 얼른 거들었어.


“어머니. 냉장고에 다 넣어 놓고 가요. 그냥 꺼내서 먹기만 하면 돼요.”


다행히 시어머니는 금방 수긍을 하셨고, 상황은 종료됐어. 하지만 너의 마음속에서는 생각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던 거지.


‘그동안 내가 너무 잘했나? ‘


너무 시어머니에게 잘해서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시나 생각했다고 했어.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네가 못된 며느리였거나 못하는 며느리였으면 그런 말씀을 하시지도 않았겠지. 너는 결혼하고 20년 넘게 시어머니를 모셨고, 서울 근교에 집을 지어 따로 나왔어. 이후 혼자 사시던 시어머니는 딸과 살림을 합쳤다가, 딸과 살기가 힘들어서 서울을 떠나 아들 며느리의 집으로 들어오셨지. 말하자면 시집살이가 아니라 며느리 집살이인 거야. 게다가 몸까지 편찮으시고. 그런 입장에서 ‘한 상 차려놓고 가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경우는 아니지.


시어머니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따지지 말자. 시어머니에겐 시어머니의 사정이 있으실 것이고, 그걸 밝히는 게 지금 편지의 목적은 아니니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 말을 듣고 네가 처음 떠올렸다는 그 말, ‘내가 너무 잘했나?’에 대한 거야.


‘잘한다’ ‘못한다’ ‘하겠다’ ‘하지 않겠다’는 것은 모두 ‘나’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지. 네가 ‘너무 잘했나’라고 생각했다는 것 ‘나는 잘한다’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는 뜻이기도 해. 물론 그동안 너는 잘해왔고 잘하고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누구누구는 잘한다’는 객관적 사실과 ‘나는 잘한다’는 주관적 생각은 전혀 달라. 객관은 늘 변하고 실체가 없는 가짜지만, 주관은 항상 내 안에 있어서 단단하게 뭉쳐있는 실체야. 그 실체, 일반적으로 ‘에고’ ‘자아’ 등으로 불리는 그 생각 덩어리가 나를 움직이고 나를 결정하고 나의 세계를 형성해.


‘나는 잘하고 있다’는 생각은 교만한 마음이야. ‘나는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열등한 마음이야. ‘나는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탐욕의 마음이지. 불교에서 말하는 ‘탐(貪) 진(瞋) 치(癡) 삼독심(三毒心)이 바로 그거야. 그러한 독의 마음으로 만들어지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당연히 독으로 가득한 ’고통의 바다‘일 수밖에 없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겠다는 생각 없이 행동하고, 잘한다 못한다는 생각 없이 생활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이 정말 가능하기는 한가?


답은 당연히 ‘가능하다’야. 물론 어려운 길이기는 하지. 우리는 부족한 인간이고, 그 부족함을 인정하고 열심히 살아갈 뿐이야. 그 어려운 길을 ‘겸손의 길’이라고 부르자. 노래 제목에도 있듯이 겸손은 힘들어.


흔히 겸손의 반대말을 교만이라고 하는데, 조금 초점이 다르다고 봐. 교만을 ‘나는 옳다’는 생각이라고 할 때, 그 반대를 ‘나는 틀렸다’라고 보면 ‘열등감’이 되지. 교만을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다’라는 생각이라고 했을 때도, ‘나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다. 사소한 부속품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면 열등감이야. 그리고 그 사이에 제3의 길, 겸손이 있지.


겸손은 일단 ‘나는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야. ‘잘못되었다’가 아니라 ‘부족하다’야. 부족한 채로 최선을 다해서 나의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겸손한 태도지. ‘잘했다 못했다 잘하겠다 안하겠다’가 아니라 ‘그냥’ ‘회개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겸손한 삶이야.


‘나는 부족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잘하고 못하고,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야. ‘나’라는 생각이 있다는 게 문제인 거지. ‘나라는 생각’이 있다는 것은 ‘내가 내 행동의 주인’이라는 뜻이고, ‘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뜻이고, ‘내 식으로 세상을 산다’는 뜻이야. 다시 말해서 교만하다는 말이지. 나의 교만을 인정할 때,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나는 겸손해질 수 있어. 겸손은 ‘나를 없애는 길’을 가는 도구야.


‘내가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오직 신만이, 하나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지. ‘우리는 유한하고 부족한 존재이고 오직 하나님만 무한하고 영원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겸손이 시작돼. 세속적인 시시비비와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거지. 


사랑하는 동생!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지 겨우 몇 개월밖에 안 되는 내가 이런 얘기하는 게 좀 이상한가? 하지만 네 믿음이 깊어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으니 나는 기쁘다. 이건 세상 사는 이야기가 아니라 본질적인, 하나님을 믿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거니까.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서, 네가 ‘한 상 차려놓고 가라’는 말을 했을 때 ‘내가 너무 잘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그때 ‘나’라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 말은 ‘이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다’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뜻이야. 잠시 ‘내가 주인’이라고 착각을 했던 거지. 그걸 회개하면 되는 거야. 잘못해서 회개하는 게 아니라, 그 착각을 회개하는 거지. 그게 인간의 길이니까. 겸손과 회개는 인간의 길을 이끄는 두 바퀴야. 나머지 두 바퀴는 찬양과 기도가 되겠지.


네가 지금처럼 열심히 믿음의 길을 가서 겸손과 회개와 기도와 찬양으로 진정한 믿음에 도달하게 되기를. 그리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시어머니가 ‘두 상 차려놓고 가라’고 해도 나를 주장하지 않게 되기를. 그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듣고 기쁜 마음으로 ‘예, 그렇게 할게요.’라고 할 수 있게 되기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삼라만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님의 조화임을 생생하게 느끼는 그런 날이 오기를. 너의 겸손에 하나님께서 분명한 응답을 주시기를.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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