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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Dec 03. 2019

딸에게 쓰는 편지 47; 영화야, 안녕!


“이제 영화는 끝이야. 다시는 영화 얘기하지 않을 거야.”


영화 <아이리시 맨 The Irishman>(마틴 스코세지 감독. 2019년)을 보고 나서 아빠가 네게 한 말이지. 밥을 먹으면서 한탄조로 내뱉은 말인데,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그리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말하자면 영화는 아빠의 인생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간단히 작별인사를 하는 건 뭔가 내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더라고.


사춘기 이후 평생 동안 영화는 아빠의 중심에 있었지. 영화로 꿈을 불태웠고, 영화로 먹고살았고, 영화로 좌절과 고통도 겪으면서 세월을 지나왔어. 흔한 말이지만 영화가 없었다면, 어쩌면 아빠의 인생도 벌써 끝나고 말았을지도 몰라. 영화는 아빠가 세상을 살아가도록 힘을 주는 배터리 같은 것이었으니까.


세상 일 다른 것은 몰라도 영화만큼은 자신이 있었고, 어느 누구와 어느 자리에서도 당당하고 자신만만했어. 보통 영화광들처럼 모든 영화를 섭렵하지도 못했고 다양한 영화 지식으로 무장하지도 않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는 나만의 확실한 주관이 있었고, 나만의 영화적 안목으로 영화를 보는 섬세한 감각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래 왔던 나의 과거에서 벗어나려고 해. 과거의 내가 가졌던 자신감과 확신, 그리고 직관력을 믿지 않기로 했어. 나 나름의 생각이 없기야 한가? 하지만 그걸 주장하거나 신뢰하지 않겠다는 거야. 전문가로서의 식견을 내세우지 않고, 그냥 평범한 보통사람으로서 영화를 보고 즐기려고 해.


아빠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꼭 <아이리시 맨> 때문만은 아니야. 영화 <기생충>(봉준호 감독.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알다시피 <기생충>은 한국영화 최초로 깐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지. 감독 봉준호는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의 감독이고, <기생충>은 그런 봉준호의 모든 것이 집약된 좋은 작품이야.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관객 반응도 좋고. 올해가 한국영화 100주년인데, 그걸 기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지.


문제는 그런 <기생충>을 보고 아빠가 시큰둥했다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아쉬웠어. ‘뭐야? 이게 끝이야?’ 하는 느낌. 약간 지루하게 보고 있다가 폭우가 쏟아지는 장면이 시작하면서 아빠는 흥이 나기 시작했지. 그렇지! 이게 봉준호지! 이제야 제대로 시작하는구나...


그렇게 신나게 즐길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영화는 대충 뻔한 결말로 끝나버리더라고. 참신한 소재에 멋진 구성, 그리고 세련된 만듦새, 훌륭한 주제의식... 뭐 하나 부족함 없는 영화인 것은 분명하나 딱 거기까지였어. 이것저것 부족하더라도, 풍성하게 넘치는 무엇을 기대했는데 그게 없었던 거지.(어쩌면 아빠가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너무 좋아하는 건지도?)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어느 정도 각자의 취향도 작용하고, 호불호가 갈리는 경우는 많으니까. 그러다가 <벌새>(김보라 감독. 2019년)을 보고 아빠는 확실히 이상증세를 느꼈지. <기생충>과 <벌새>는 2019년을 대표하는 두 편의 한국영화라고 할 수 있어. 관객의 반응도 좋고 평단의 평가도 좋고 흥행도 잘 된, 그야말로 좋은 영화의 모범적인 케이스지.


<벌새>도 <기생충>과 비슷했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겠는데,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거야. 이해는 되는데 공감이 안 되는 거지. 나는 예술은 이해보다는 공감이 먼저라고 봐. 심금을 울린다고 하지? 마음을 먼저 두드려야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인정하는 작품을 내가 공감하지 못한다면? 분명히 좋은 작품이라고 인정이 되는데 감동을 받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내가 잘못인 거지. 나의 공감대가 고장 났거나 둔해졌다고 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아이리시 맨>을 본 거야. 


10, 10, 10, 9, 8, 8...


씨네 21의 전문가 평점이야. 이 정도면 거의 걸작이라 평가를 받을 만한 점수지. 아빠의 점수는? 굳이 주라면 8점을 주겠어. 하지만 마음이 따르지 않은 점수야. 좋은 영화이긴 하나 좋아하지는 못하는 거지. 똑같이 마피아를 다룬 드라마 중에 <소프파노스>라는 미국 미니시리즈가 있어. 나는 차라리 <소프라노스>가 <아이리시 맨>보다 훨씬 재미있고 좋아. 영화적으로 세련되거나 잘 만들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소프라노스>에는 뭔가 싱싱함이 묻어나. 나는 그 살아있는 싱싱함이 좋아. 그런 작품이 진짜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해.


<기생충> <벌새>에 이어 3 연타석으로 공감에 실패하고 나니 확실하게 그런 생각이 들어. 아... 이제 나는 영화 전문가가 아니구나... 그냥 평범하게 즐기는 보통 관객이구나... <소프라노스>를 좋아하고, <응답하라 1988>에 빠져들고, <동백꽃 필 무렵>을 재미있게 보고, <놀면 뭐하니?>에 깔깔거리는 동네 아저씨구나...


사랑하는 딸!

사실 영화는 아빠를 지켜준 버팀목이자 최후의 자존심인데, 이제 아빠는 그걸 떠나보내려고 해. 사람은 대체로 ‘이것만큼은 질 수 없지.’라고 할만한 자기만의 주특기가 있기 마련인데, 아빠한테는 영화가 그거였어. ‘세상 누구와 붙어도 지지 않는다’는 짱짱한 자신감, 1대 70억의 당당함... 이젠 그런 거 없어. 세상 누구나와 평등하게 한 표야. 나는 그저 70억 분의 1에 불과한 거지.


기분이 어떠냐고? 나쁘지 않아. 홀가분하고 편안해. 오래 의지하던 목발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후련해. 절룩거리면서 그냥 걸어가야지.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느끼는 대로, 그냥 나대로 살아갈 거야. 너와 엄마,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가야지. 그래서 가볍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해. 영화야 안녕, 영화야 잘 가라...


  --- 아주 오래 사귄 애인을 떠나보낸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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