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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Jan 31. 2020

여편에게 1; '여보'라 부르지 못해서 미안해


굳이 김춘수의 시 <꽃>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분명 의미심장한 일일 거야.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그것이 존재함을 인정받고 의미가 생겨나는 거지.

구체적으로 뭐라고 지칭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이름을 부르건 직책을 부르건 별명을 부르건 무슨 상관이야? 상대를 불러서 상대와 내가 연결되고 소통한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거지.     

부부간에 호칭도 꽤 다양하게 많더라고? 제일 흔한 게 ‘여보 당신’이지. 그 밖에 ‘자기’나 ‘아무개 씨’ 혹은 ‘누구 아빠, 엄마’라고 많이 부르고, 드물게는 ‘어이’ ‘야’라고 하는 경우도 있어.   

  

“당신은 한 번도 나를 불러본 적이 없어, 뭐라고도!”     


결혼한 지 20년도 넘은 부부 사이에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신은 내가 결혼 이후 한 번도 ‘여보’를 비롯한 어떤 호칭으로도 당신을 부르지 않았다고 했어.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잠시 돌이켜 생각하고는 당신 말이 맞다고 인정해야 했지. 나는 당신을 부른 적이 없었어.     


당신이라고는 자주 했는데...

그러나 ‘당신’은 부르는 것이 아니지. “여보. 당신은 참 멋져.”라고 할 때, ‘여보’가 부르는 것이고 ‘당신’은 그저 대명사 You야. 그런데 나는 ‘여보’를 생략하고 ‘당신은 참 멋져.’라고 말하면서 당신을 불렀다고 착각했던 거였어.     


그러면 밖에서 불러야 할 때는 어떻게 했을까? 가까이 있을 때야 그렇다 쳐도, 멀리 있는 당신을 불러야 할 때는 뭐라고 했지? 이리저리 돌이켜 생각해 봤는데, 당신 말이 맞았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지만, 나는 한 번도 당신을 부른 적이 없더라고. 그 사실을 알고 나는 정신이 아뜩해졌어.     


사랑하는 여편!

분명히 당신을 불러야 할 때가 있었을 텐데 왜 나는 당신을 부르지 않았을까? 아니, 부르지 못했을까? 당신을 불러야 할 상황이 되면 나는 머뭇거리다가 멈췄을 거야. 당신과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리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직접 다가가거나 그랬겠지. 멀리서 손을 흔들어보기도 했을 테고, 그렇게 의사소통이 되기도 했겠지만 그게 무슨 소용? 정작 나는 당신을 불러보지도 못했는데. 이미 가슴에는 허전한 찬바람이 지나간 다음인데...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지.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지 못하면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상식이냐 아니냐 보편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자신이 납득하는 길밖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 죽음과 파멸이 뻔히 보인다고 해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야만 하고, 그런 그런 삶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어쩌면 선천적 질환인지도 몰라. 그냥 남들이 다 하듯이 ‘여보!’라고 부르면 되는데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처음에는 어색해도 하다 보면 금방 익숙해질 텐데. 자전거 배우듯 수영 배우듯, 그렇게 시작만 하면 이내 당연한 이름이었던 것처럼 부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설득하는데 실패했고 ‘여보’라는 이름은 내 선택에서 사라졌지. ‘그럼 뭐라고 부르지?’라고 고민도 했지만 마땅한 것을 찾지 못했어. 그러다가 ‘여편’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냈지. 당신이 나를 ‘남편’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어울리고, ‘여편네’라는 식으로 비하되기는 했지만 원래 있는 말이기도 해서 나름 ‘잘 찾아냈다’고 흐뭇해했어.     


그러나 실제로 ‘여편’이라는 이름을 쓰지는 못했나 봐. 나는 썼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당신이 ‘들은 적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나의 착각이었던 거지. 글에서나 친구들과 얘기하면서 당신을 지칭할 때는 많이 쓰는데, 실제로 당신을 부를 때는 쓰지 않았던 거야. 자신이 없었던 거지. ‘여보’라는 평범한 언어로 당신을 부르지 않고 ‘여편’이라는 새 언어로 부르면 남과 달라지는데, 남과 다르게 보이는 게 두려웠던 거야.     


젊었을 때라면 거침없이 불렀겠지. 그땐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어떤 비난이나 고통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으니까. ‘먹고 살기 위해 일하지는 않겠다. 가치 있는 일을 해서 먹고살겠다.’고 생각했고 그걸 지키며 살려고 노력한 젊은 시절이니까. 그 때라면 당당하고 떳떳하게 ‘여편!’하고 불렀을 거야.     


나이가 들어 달라졌는데, 아직도 나는 당신을 부르지 못하네?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만의 길이 아니라 대중들의 길을 함께 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는데. 꼭 ‘여편’이 아니어도 ‘여보’라고 부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막상 ‘여보’라고 부르려고 하면 입이 안 떨어져. 미안. 정말 미안해. ‘여보’라고 부르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너 백조 알지? 백조... 이 백조가 물 위에서는 폼나고 우아하지? 그런데 물속은 어떤 줄 알아? 졸-라게 헤엄치고 있어.”     


영화 <넘버 3>에서 한석규가 하는 대사야. 내가 백조처럼 한가하게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열심히 노력 중이라는 걸 알아줘. 어느 순간, 아이가 처음 ‘엄마, 아빠’를 부르듯 당신을 부르는 그런 때가 올 거야. 그리고 그 날 내가 멋진 식사를 살게. 내가 당신을 불렀다는 것은 나의 불구가 치유되고 한 단계 더 성숙해졌다는 뜻이니까. 당신 덕분이니까.     

  

 --- 평범한 백조가 되기 위해 졸-라게 헤엄치는 남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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