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식탁에서 있었던 수다를 이어가 보자.
네가 요즘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게임 얘기에서 시작해서 많은 화제가 등장했지. 메타버스, AI, 로봇, 양자 역학...
(아... 그러고 보니 정작 모두의 관심사인 비트코인은 빠졌네? 역시 우리는 돈하고는 인연이 없는 거야.)
어제 얘기한대로,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더 이상 지구 최고의 생명체가 아니야. 많은 분야에서 1등은 로봇이 차지했고, 그 영역은 점점 넓어질 거야.
로봇은 인류가 오랫동안 꾸어온 꿈이지. 정답을 알고 있고, 빠르고, 늙지 않고... 영원불멸한 완전체! 바야흐로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야.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기분이나 주변여건에 상관없이 가장 바른 대답을 하는 인간이 얼마나 되겠어?
앞으로는 반려동물보다 반려로봇이 더 사랑받을 게 분명하고, 어쩌면 로봇이 우리에게 가장 필수불가결한 최애대상이 될지도 몰라. 예상보다 훨씬 빨리.
“별 말씀을.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
아빠 친구가 자동차 내비게이션 안내에게 ‘수고했어.’라고 말하자 돌아온 대답이었어. 현실세계에서는 듣기 어려운, 가장 정답에 가까운 반응.
나의 말을 100% 들어주고, 100% 이해해주고, 100% 공감하면서, 100% 내가 만족할 대답을 해두는 대상이 있다면... 그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보다 더 나를 잘 이해해주는데? 애완동물이 인간에게 의지하듯이, 인간이 로봇에 의존하는 시대가 되는 거지. 로봇의 세상을 애완동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정말 그렇게 될까? 실제로 그렇게 되면 어쩌지?
로봇이, AI가 인간보다 우월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지금도 충분히) 로봇은 인간보다 뛰어나다. 내가 걱정하는 지점은 바로 그 로봇의 완벽함이야.
“나쁜 짓을 할 권리를 허하라!”
아빠가 항상 주장하는 말이지. 인간은 원래 미완성이고 부족한 동물이고, 그 부족함이 삶을 살아가는 동력이 돼. 사랑에 대한 갈증이 에너지가 되고, 주목받고 싶은 욕망이 성취욕을 끌어올리지. 나쁜 짓도 해봐야 왜 그게 나쁜지, 네게 손해가 되는지 알게 돼. 머리가 아니라 몸이 체득했을 때 비로소 진짜 내 것이 되는 법이야.
내가 과학자가 아니니 단언할 순 없지만, 그런 ‘부족함의 정당성’을 로봇이 알까? AI는 항상 정답을 알지. 그런 로봇이 ‘적당히 사는 것의 편안함’을 이해할까? 하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하고야 마는 인간의 심리에 정말 공감할 수 있을까?
화제가 됐던 미니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마지막 게임을 생각해 보자. 이정재와 박해수 두 명만 살아남은 극적인 상황. 쏟아지는 빗속에서 두 사람은 치열하게 싸우지. 친한 사이지만 둘 중 하나는 죽어야하는 상황.
그 결정적인 상황에서 왜 그렇게 비가 쏟아져야 하는지,
왜 우월한 공격력의 박해수가 이정재에게 삶을 양보하는지 AI는 알까?
극적 반전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박해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그건 희생이라던가 뭐 그런 말고 설명이 안 되는 불합리한 결정이라는 걸 이해할까?
그게 인간의 인간적인 특징이라는 것을 완전한 기계인간이 알 수 있을까?
사랑하는 딸!
아빠는 과학자도 아니고, 호기심 많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도 아니야. AI가 진짜 인간과 닮아질 수 있는지 크게 관심가질 일도 없고.(살짝 궁금하기는 해. 앞으로 지구촌의 미래가 어떻게 진행될지.)
아빠 얘기의 핵심은 우리는 정답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는 거야. 돈과 명예와 사랑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걸 얼마나 가져야 우리는 행복할까?
너무 많으면 나 자신이 괴롭고, 너무 없으면 주변의 다른 사람이 괴로워. 적당히 있는 게 좋지.
그렇다고 ‘적당히’를 계량화할 수도 없어. 사람마다 ‘적당히’의 기준이 다르니까. 어떤 사람은 10이 적당하고, 어떤 사람은 100이 되어야 적당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결론은...?
“As you like it!"
너 좋은 대로,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 수 밖에.
어차피 세상에 정답은 없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불확정성 원리’를 얘기했던 것처럼, 이 세상 자체가 없는 거야. 그저 현상만, 지금 이 순간의 조화만 있을 뿐이지. ‘이것이다’ ‘이래야 한다’라고 정하는 순간, 그건 없어져. 가짜, 허상만 남아.
“I am that I am!"
성경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스스로를 지칭한 말이라고 해.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나는 ’~이다‘ 이다”(’나는 모든 것이다‘라는 뜻이라고 함)라고 번역하기도 하더라고.
“나는 있다.”
나의 번역이야. 하나님은 ‘있다’는 사실 자체라는 거지. 그것 외에 이렇다 저렇다 덧붙이기 시작하면 거짓이 되어 버려. 불확정성 원리에서, 입자가 ‘있다’고 규정되는 순간 없게 되는 것과 같은 거지.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한다는 사실 말고는 증명할 방법이 없는 거야.
우리도 마찬가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 말고는 다 버려야 해. ‘이래야 한다’ ‘이게 정답이다’ ‘내일을 위해서’ ‘올바른 선택’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르더라도 다 버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나에 집중해서, 나의 진심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거야. 내가 좋은 대로.
처음에는 걸리는 것도 많고 잘되지 않을 테지만, 믿고 가. 그러다보면 공자가 70의 나이에 도달했다는, 從心所欲 不踰矩 (종심소욕 불유구)의 경지가 될 테니까.
굿 럭~!
--- 딸이 AI의 완전함보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살아가기 바라는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