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지에서 “네 맘대로 살아!”라고 말하고 나니 스믈스믈 걱정이 솟아오른다.
비난과 비웃음이 예상됐거든.
‘세상에 맘대로 사는 사람이 어딨다고. 철없는 아빠 같으니!’
‘전혀 현실감 없는 얘기. 무책임하군!’
‘하늘은 파랗다는 말하고 뭐가 달라? 항상 구름이나 미세먼지에 가려있는데...
밤에 봐. 아무 것도 안 보여. 파랗기는 개뿔!‘
미안. 내가 너무 맥락 없이 말을 해버렸나 봐. 그래서 이번엔 좀 자세히 얘기를 풀어볼까 해.
“생명이 위협받을만한 일이 아니라면 억지로 막지 않겠다.”
아빠가 너를 키우면서 나름 세웠던 유일한 원칙이야. 가끔 엄마가 질색하는 상황이 있기도 했지만, 대체로 잘 지켜졌다고 생각해.
물론 위험한 경우는 언제든 생길 수 있어. 그게 무서워서 네가 원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시키기 보다는, 곁에서 지켜보면서 조심하고 대비하겠다는 게 아빠의 생각이었지.
안된다고 했던 일이 있었다고? 많았다고?
아빠 성격상 많았을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건 말만 그렇게 한 거야. 마음으로는 ‘네가 정말 원하면 맘대로 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말과 생각, 몸과 마음의 불일치.
우리는 3살 이후로 말과 생각이 일치한 적이 없었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 적이 없어. 항상 어긋났지. 욕망과 감정과 생각이 각각 자신의 영향력을 주장하고, 몸은 그때그때 힘이 센 쪽의 명령을 수행하게 돼. 때론 욕망이 앞서고, 때론 감정에 휘둘리고, 때론 생각의 용병이 되어 행동을 하지.
“산에 핀 꽃이 예뻐서 꺾어다가 집에 놓고 보니 좋더라.”
이 말이 별 문제가 없어 보이면 이건 어때?
“놀이터에 꼬마애가 예뻐서 집에 데려와 같이 놀았어.”
갑자기 공포영화 같은가?
“TV에서 맛있는 음식이 나오길래 나도 시켜 먹었지. 만족스러워.”
이 세 가지는 다른 듯 보이지만 똑 같은 공식에서 나온 결과야.
대상(꽃, 아이, 음식)에 욕망이 생겨서, 좋은 기분이 들고, 그 욕망과 감정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동을 한다...
물론 실제 현실에서는 다양하게 변주가 되지.
‘사람들 눈치가 보여 차마 꽃을 꺽지 못하고 집에 오니 우중충한 집구석에 화가 난다.’
‘꼬마애가 예쁘지만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까봐 참고 집에 와보니, 우리 애는 어째 이렇게 미운 짓만 하나? 한바탕 소리를 지른다.’
‘비싸게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는데도 만족스럽지가 못하다. 다른 걸 더 먹고 싶지만 배도 부르고, 살이 찔까봐 그냥 참는다. 에이! 잠이나 자자.’
흔히 있는 일이지만, 사실은 아주 임의적이고 논리가 없는 거야.
꽃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건가? 또, ‘나는 꽃만 보면 화가 난다’고 하면 그건 당연한가?
아이를 보고 ‘귀엽다’고 하고, 음식을 보며 ‘맛있겠다’고 흥분하는 게 당연한 과정인가?
“산은 산, 물은 물.”
옛날 성철이란 스님이 남긴 명언이야. 마찬가지로, 꽃은 꽃이고 예쁜 건 예쁜 거야. 전혀 상관없는 것이 임의로 연결되었을 뿐인 거지. 교육에 의해서, 혹은 경험에 의해서.
욕망은 그저 욕망일 뿐인데, 우리는 욕망은 충족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게 돼. 세상의 수많은 성범죄는 모두 그러한 관습적인 연결고리 때문에 일어나는 거야.
몇 년 전에 제주도의 고위 공무원이 성범죄로 현장 체포된 일이 있었어. 그 뉴스를 보고 아빠는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는데, 그 정도로 성공한 주류 성인 남자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였지.
상황은 간단해.
1. 성적 욕망이 생겼고,
2.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밤새 거리를 헤매며 여러 여자들을 상대로 성추행을 했다.
자신의 욕망을 잘 관리하며 성공의 길을 걷던 중년 남자가, 어느 날 밤 돌발 사고같은 욕망의 분출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던 거야.
헌데 잠깐 돌이켜 생각하면, 이런 종류의 성적 스캔들은 부지기수로 많아.
유능한 남자의 여성 편력...
권력자들의 성적 일탈행위...
다만 이 남자의 경우 그런 욕망이 미숙한 형태로 돌출된 게 특이한 점이지. 대부분의 성공한 남자들은 자신들의 부적절한 행위도 성공적으로 관리를 하니까.
이련 류의 사례를 얘기하자면 1박2일도 부족하지 빨리 핵심으로 들어가자.
성적 욕망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유는 간단해. 세상의 잣대가 이중적이기 때문이야. 동일한 종류(욕망)에 대해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니까 문제가 생긴다고.
흔히 성욕과 식욕, 명예욕을 인간의 3대 욕망이라고 한다. 근본적인 욕망이라고 해서 본능이라고 부르지.
같은 본능이지만 대접받기는 아주 잘라. 명예욕은 어려서부터 크고 강할수록 칭찬을 받지. 공부를 잘하고, 운동을 잘하고, 노래를 잘하고, 돈을 잘 벌고...
공부를 잘하려는 욕망을 아무리 지나치게 해도 비난하는 사람 없고, 운동을 잘하려고 상대를 무참히 패배시켜도 관중은 열광하고, 노래를 잘하려고 자신을 극심한 학대로 몰아넣어도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칭송돼. 돈을 잘 버는 게 진리가 된지는 오래됐고.
식욕은 워낙 생존에 직결되는 요소라 적당히 균형을 맞춰. 양과 질의 편차는 있지만 대개의 경우 그럭저럭 충족이 되는 편이지. 편의점 컵밥을 먹어도 어차피 한 끼인 건 똑같으니까. 요즘 국가가 생존 차원의 보장을 확대하는 것도, 인권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을 하지만 사실은 체제의 유지에 그 목적이 있다고 봐야지.
성욕은 조금 복잡해. 명예욕은 심리적인 요소가 많고, 식욕은 심리보다는 육체적인 요인이 더 강하지. 성욕은 심리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이 밀접하게 섞여있어. 다시 말하면 관리하기가 더 어렵단 얘기지.
(전략)
...간단히 두 가지만 말할게.
첫째, 쾌락으로서의 섹스가 유행하고 사랑으로서의 섹스는 점점 잊혀지고 있다는 것. 사회적 추세와 각종 매체에서 보여지는 섹스의 태도는 쾌락이 섹스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먹방을 보면서 ‘나도 저것을 저렇게 먹어봤으면’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지. 거기에는 내가 없어. 가짜 이미지에 홀린 허깨비 나만 있을 뿐이지.
둘째,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의 섹스도 불완전하기가 쉬워. 항상 완전한 통함, 만족한 오르가슴을 경험할 수는 없다는 거야. 섹스도 일종의 상대가 있는 게임이니만큼 내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지. 더군다나 우리는 섹스를 구체적으로 배울 기회가 없기 때문에 미숙한 채로 실전에서 헤매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 그리고 갈등이 없는 편한 길, 섹스 로봇의 길로 가버리는 거지. 그것은 쾌락의 길이기는 하지만 세상과는 단절되는 길이야. 내 쾌락을 위해 남에게 폭력적으로 되는 길이기도 하고.(후략)
--- <딸에게 쓰는 편지 44; 섹스란 무엇인가?> 중에서
성욕이라는 이름에는 쾌락과 사랑이 뒤엉켜있어서 우리를 혼란케 해. 단순히 쾌락이 일어나도 사랑을 해야 할 것 같은 착각이 들고, 그 헛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어두운 거리를 해매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앞에 말한 제주도의 고위 공무원처럼.
“그럼 어쩌라는 거야? 참으라는 거야?”
“내 맘대로 하라더니, 왜 이제 와서 딴 소리야?”
당연한 의문.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말하면 대부분 ’죽여도 되냐?‘ ’훔쳐도 되냐?‘ ’강간해도 되냐?‘ 그런 것들을 물어본다. 금지된 것들에 대한 억눌린 욕망이 머리를 내미는 거지.
여기서 잠깐 용어 정리를 하고 가자. 흔히 쓰는 뜻과 아빠가 말하는 ‘마음’의 뜻은 다르니까.
마음...
마음이란 무엇인가?
아빠가 말하는 마음은 ‘주인으로서의 나’를 뜻해. 우리의 몸과 욕망, 감정 생각 등을 총괄하는 지휘소.
처음에 예를 든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산에 핀 꽃이 예뻐서 꺾어다가 집에 놓고 보니 좋더라.”
1. 꽃을 보았다.
2. 예쁘다.
3. 꽃을 꺾었다.
4. 두고 보니 좋다.
몸의 영역과 욕망의 영역과 감정의 영역과 생각의 영역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우리가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예쁘다’ “갖고 싶다‘ ’좋다‘는 등의 작용은 마음의 작은, 순간적인 부분현상에 불과해. 그 자체는 마음과 전혀 상관이 없단 말이지. 마음은 ’그런 작용들이 일어나는 바탕에 있는 그 무엇‘이니까.
우리 삶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이처럼 부분현상을 임의적으로(습관적으로) 연결시키기 때문이야.
배고픈 것과 먹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어.
죽이고 싶다는 생각과 실제 행위는 전혀 다른 영역이야.
성적 욕망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걸 해소하기 위해 꼭 뭔가를 해야 할 필요는 없어.
다만 우리가 그렇게 길이 들어있을 뿐이지.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육체적 욕망, 감정, 생각 등 모든 요소들의 작용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야. 10명의 사람이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자유를 주듯이, 나의 모든 부분들에게 자유를 주는 거지. 그리고 거기에서 도출되는 결과들 받아들이는 것, 그게 마음대로 하는 거야.
자율과 자유, 그것의 아름다운 조화가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야.
“내 뜻대로 마시옵고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신에게 결과를 맡기듯이,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 마음이 행하는 대로 따르는 거지. 신을 모시듯 내 마음을 모시는 거야. 내 마음에 하나님이 깃들어 있으니까.
사랑하는 딸!
얘기를 단순하게 풀어보겠다고 한 게, 또 뜬구름 잡는 얘기가 되어 버린 것 같아.
예들 들어볼게. 맞는 예가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마무리는 해야 하니까.
아빠는 엄마하고 싸운 적이 없어. 적어도 아빠 기억으로는 그래. 싸울만한 일이야 왜 없었겠어? 기분이 나쁜 적도 있었고, 의견이 다른 경우도 있었지.
“여편과는 절대로 싸우지 않겠다.”
아빠가 정한 원칙이야. 엄마는 아빠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야. 사랑하고 함께 할 소중한 존재지.
결혼 초기에 정말 싸울 뻔한 적이 있었어. 특히 결혼 초기에는 갈등이 많기 마련인데, 그날따라 엄마가 강력하게 대시를 하더라고. 뭔가 작정을 하고 승부를 내려는 듯 싸움을 걸어왔어.
아빠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했겠어?
도망쳤어.
손자병법에도 나온 최고의 방법!
근처 카페로 피신했다가 피차 진정이 된 후에 돌아왔지. 왜 그랬는지,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아빠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있었을까?
당연히 ‘싸우자’는 생각도 있었지. ‘싸우지 않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싸우려는 생각의 종점은 ‘이 결혼, 이 관계를 끝내자’는 생각이 있지.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는 가장 좋은 것부터 가장 나쁜 것까지 동시에 존재해.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거지.
선택...
마음대로 하는 게 어렵다고 느껴지면 가장 근본적인 것을 정해놓고 그걸 기준삼아 선택하면 돼. “내 뜻대로 마시옵고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근본원칙에 의지하는 거지. 말하자면 아빠한테는 엄마가 하나님인 셈...(옛날에는 믿음이 부족해서 도망갔지만 요즘은 도망 안 가.)
아빠가 말하는 '마음대로 한다'는 말은 뜻을 정하고, 그 뜻에 내 마음을 싣는 거야.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살아가듯, 참선하는 사람들이 '이뭐꼬' 화두를 들고 자신을 내려놓듯, 뜻을 정해놓고 나머지는 그냥 놔두는 거지.
그러다보면 정말로 마음대로 해도 괜찮은 때가 오겠지. 원칙에 의지하지 않아도, 공자가 70의 나이에 도달했다는 從心所欲 不踰矩 (종심소욕 불유구)의 시간이.
오늘도 굿 럭!
---- 딸이 마음껏, 마음대로 살기를 바라는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