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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Jan 29. 2019

동생에게 ②; '믿는다는 것'에 대하여

동생에게.

이번에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색다른 경험을 했어. 마드리드의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서의 일이야. 사실 마드리드에서는 프라도 미술관이 유명하고 규모도 크니까, 티센 미술관은  나로서도 별 기대 없이 들어간 미술관이었어.

(우리식으로 하면) 3층 규모의 작은 미술관이고, 3층에는 가장 오래된 작품들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근현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지.


순서대로 보기 위해 3층의 계단을 올라가서 전시실로 들어갔어. 14,5세기의 성화가 전시된 입구의 작품들을 본 순간, 나는 마음속에 어떤 울림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어.  순간적으로 나는 당황했지. 성화에 대해서 별로 호감이 없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내 안의 반응에 적응이 안 되는 거야.


그림은 입구 쪽에 있던 조그만 성화 세 점이었어. 메모도 않고 사진도 찍지 않아서 작가가 누구인지 제목이 뭔지도 몰라. 돌아온 다음 그 작품이 뭔지 알아보려고 이리저리 인터넷을 뒤졌지만 알 수 없었어. 연대기 순으로 전시되었으니, 가장 오래된 작품들 중 하나일 거라고 짐작할 뿐이지.


솔직히 지금은 그 작품들의 내용이 뭐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 성화였으니, 뭔가 성경과 연관된 어떤 그림이었겠지? 그날 본 성화들 중에 '수태고지'에 대한 그림이 많았던 것을 보면, 그런 종류의 어떤 상황을 그린 작품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림의 내용이 아니라 왜 그 성화들이 내 마음을 움직였을까 하는 점이야. 성화에 대해서, 특히 오래된 성화들의 양식적인 표현에 대해서 비호감이었던 내가 왜 그런 작품들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호감이 있던 사람의 마음을 얻기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그 성화들은 비호감이던 내 마음에 '뎅~!' 종소리를 울릴 수 있었을까?

티센 미술관 흠페이지를 뒤져서 겨우 찾았는데. 아마 이 그림 아니었을까...?


대상에 대한 전적인 믿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참회와 헌신의 마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감사와 환희...

그 조그만 성화들을 보며 내 마음에 들어와 심금을 울렸던 요소들을 적어봤는데, 이해가 되니? 나는 솔직히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이런 것이 느껴지면 누구나 엄청난 감동을 받아 마땅하지만, 문제는 왜, 그때, 그 이름 없는 성화를 볼 때 그런 마음이 되었는지 설명할 수가 없어. 그날 나는 수많은 성화를 보았고, 훨씬 더 유명한 화가의 이름난 작품도 많았지. 그런데 왜 그 작품들이 아니라, 가장 오래된 작품들에 감동을 느꼈을까?


15,6세기 본격적으로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서 그려진 성화들은 전혀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어. 그림으로는 훌륭했을지 모르나, 기술적으로는 발전했을지 모르나 앞에서 말한 감동의 요소들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미술에 문외한이니까 전문적인 분석은 할 수 없지만, 나 나름으로 생각하면 소위 '르네상스 정신' 때문이 아닌가 싶어. '르네상스'를  쉽게 '인간중심주의의 부활' 정도로 볼 때, 그런 인간 중심의 사상이 오히려 성화의 본질을 훼손하고, 작품의 감동을 차단시키는 작용을 한 게 아닌가 생각되는 거지.


미술은 우리의 주제가 아니니 본론으로 돌아가자. 나는 그 성화들이 내게 감동을 준 이유가 '올바른 믿음'의 태도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믿음을 바탕으로 한 진실한 생활, 자신에 대한 충분한 속죄와 참회, 그리고 신에 대한 감사와 헌신... 그런 마음의 자세가 작품 속에 꽉 차게 그려졌고, 그게 자연스러운 향기로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 최선의 것을 몽땅 드리려는 자세... 그런 믿음의 상태가 그 성화들에게서 느껴졌어.


전에 했던 편지(<로마서를 읽고>)에서도 얘기했듯이, 이건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행위'의 문제야. 믿음의 출발은 사랑이고, 사랑의 증거는 행동이지. 내 믿음의 세계를 내 일과 생활 속에서 실천해 내는 것, 그것이 올바른 믿음의 자세가 아닐까?


여행 갔다 와서 잠깐 얘기했지만, 언니가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어쩌면 신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했다는 것도 마찬가지 경우 아닌가 싶어. 너도 알다시피 언니는 매우 굳건한 불신자인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신의 존재를 떠올렸다는 것은 그만큼 그 성당의 감동이 강력했다는 얘기지. 가우디라는 건축가의 진심이, 그의 믿음이, 그의 믿음의 실천이 (성화가 내 마음에 울림을 준 것처럼) 언니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는 말이니까.


사랑하는 동생!

네가 믿음이 깊어서 편하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으니 기쁘다. 너는 믿음이 깊고 나는 나이가 깊으니, 믿음과 나이는 서로 기대면서 깊어가는 사이니까. 어쩌면 이런 편지를 통해서 나도 믿음의 길을 탐색하려고 하는지도 모르지. 나는 신을 믿지만 실제로 경험하지는 못했는데, 어떻게 하면 신을 직접 만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면서, 오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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