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하태평 Mar 06. 2019

동생에게3;'나는교만한사람이다'


오전에 집에서 있었던 일이야. 누가 문을 두드려서 누구냐고 했더니 택배래.

마침 반품할 게 있던 터라 반갑게 문을 열었더니 중년의 남자가 종이를 내밀어.


“204호에 이사오는데, 싱크대를 수리해야 돼서요...”


약간의 소음이 있어서 미리 양해한다는 서명을 받으러 왔다는 거야.

반품할 물건까지 들고나갔던 나는 실망을 감추고 서명을 했어. 남자는 고맙다며 떠나갔고, 나는 다시 들어와 마늘을 찧기 시작했지. 마늘을 다지는 중이었거든.


‘고얀 놈. 속았네...’


가볍게 욕을 해주고 절구질을 하는데, 금방 있었던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 남자는 왜 택배라고 거짓말을 했을까? 왜 솔직하게 수리한다고 말하지 않았지? 그렇게 말하면 문을 안 열어주나? 그렇다고 거짓말까지 하는 건 잘못 아닌가? 역시 사람들 말은 믿을 게 못돼, 등등...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점점 커져서 태풍이 된다고, 남자의 사소한 거짓말은 결국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결론지어졌어.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간절한 이유가 있다. 그때 그 순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나름의 곡절이 있게 마련이다. 그 남자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부득이하게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공사를 해야 하는 동네 인테리어 사장님일지도 모르고, 오늘 안으로 서명받기를 끝내고 당장 공사를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돈을 벌기 위해서, 맡은 일을 잘 끝내기 위해서 이 정도 거짓말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그 남자의 선택이 바르냐 그르냐를 추궁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야. 페널티 킥을 할 때, 키커는 어떻게든 골기퍼를 속여야 해. 무슨 수를 쓰던지 골을 넣어야 하는 게 키커의 할 일이고, 그 속임수를 이기고 막아내는 게 골키퍼의 할 일이지. 그 남자는 속임수를 써서 골을 넣었고, 나는 막지 못한 거지.


여기서 내가 억울한 것은, 나는 골을 막을 생각이 없었다는 거야. 남자가 원하는 서명을 거절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남자를 탓하는 거지. 그래서 남자를 욕하고, 불신 가득한 세상을 탓하고, 결국 나 스스로가 불신지옥에 빠져버린 거야.


자!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정말로 그 남자는 거짓말을 한 죄인이고, 나는 영문도 모르고 속아 넘어간 선의의 피해자였던 걸까? 결론은 ‘그렇지 않다’야.

얘기가 길어지지 않게 간단히 말할게. 남자가 ‘택배’를 말한 것은 그렇게 말해야 아파트의 문이 가장 쉽게 열리기 때문이야. 옛날에 ‘열려라 참깨’가 문을 여는 주문이듯이, 요즘은 ‘택배 왔어요’가 마법의 주문임을 알고 있는 거지. 남자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주문을 외운 것뿐이야. 다시 말해 그 남자는 잘못이 없다!

잘못은 나에게 있었어. ‘택배’란 말에 문을 연 것까지는 괜찮아. 문제는 그 다음이지. 문을 연 다음 택배가 온 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어떻게 했지? 잘못 안 것(속았다고 생각했지)을 아닌 체하고 그 남자의 말대로 종이에 서명을 했어. 문을 열어준 것(목적)과 전혀 다른 행동(결과)을 했지만,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가 없었지.


어떻게 했어야 좋았을까 생각해 본다. 첫째는 서명을 하면서(안 해줄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그냥 말씀하시지. 택배 온 줄 알았어요. 마침 택배 기다리던 참이라 실망했네요.’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 

또 하나는 ‘잠깐 기다리세요.’ 하고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 이건 처음에 실수한 것을 종료시키고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이는 자세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상황을 구분해서 처리한다는 점에서 보다 정확한 대처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별 것 아닌 일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일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는 불신이 쌓이지. 사실은 나의 문제인데도 상대가, 세상이 문제인 것처럼 왜곡되기도 해.

그런 불신과 왜곡을 막는 길은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나 자신에 솔직하고 충실해지는 거야. ‘아닌 척’ 하지 말고 진실하게 나 자신을 드러내는 거지.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해.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 역으로 말하면 모든 믿음의 출발은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라는 말이지.


믿음의 출발은 사랑이고, 사랑의 증거는 행동이지. 내 믿음의 세계를 내 일과 생활 속에서 실천해 내는 것, 그것이 올바른 믿음의 자세가 아닐까?


지난번 편지 ‘동생에게 2’에서 한 말인데, 다시 정리하면 믿음에서 사랑이 나오고, 사랑에서 구체적인 행동이 비롯된다는 거야. 그런데 이번 나의 경우처럼 믿음이 부족하면, 솔직하지 못하고 ‘아닌 척’ 위장에 능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20세기 초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한 말 중에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이라는 게 있어.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작은 행동들이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뜻이지. 크고 대단한 뜻을 가지고 하는 행동보다 무심코 행하는 작은 행동들이 훨씬 더 우리의 진심을 담고 있다는 거야.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나로서, 내가 행한 오늘의 작은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다 보니 갑자기 네가 하던 말이 생각이 난다.


네가 그동안 나에게 하던 지적, ‘교만하다’는 말... 인정할게. 갑자기 내가 ‘죄 많은 사람’처럼 생각되는데, 다소 순화시켜서 ‘부족한 사람’ 정도로 말하기로 하자. 네 말이 맞아. 나는 부족하고 솔직하지 못하고 교만한 사람이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윤동주의 <서시(序詩)> 중에서


그렇다고 이렇게 윤동주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나는 나니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솔직하지 못하면 좀 더 솔직하려고 노력하면서, 교만함의 문턱을 갈고닦아서 평평해질 때까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늘 낮에도 미세먼지가 바람에 스치운다. 아무리 세상이 오염되고 살림살이가 고되더라도, 나와 너와, 우리와 세상을,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자. 

다시 한번, 사랑한다 동생아.

      --교만함을 인정하는 오빠가.

매거진의 이전글 동생에게 ②; '믿는다는 것'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