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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굶어 죽는 일이다.

광주교육청 박주정 교육장의 삶과 신앙 이야기

광주교육청 박주정 교육장 간증          

초등학교 때 선생님 때문에 아버지를 잃다.          

기독교방송 새롭게 하소서를 보았다. 광주광역시 박주정 교육장이 출연했다.

10살 때 아버지가 선생님 때문에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아버지는 선생님과 경찰관을 하셨다. 운동을 좋아하셨고 잘하셨다. 

달리기 대회에서 넘어지면서 수술을 했다. 당시 지방의 의료 수준은 형편없었다. 여러 차례 수술했지만 아버지는 불구가 되어 목발에 의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많은 수술비로 가정경제는 어려워졌고 가족은 시골로 들어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농한기에 동네 청년들에게 한학을 가르치셨다. 청년들은 아버지에게 주산과 암산도 배울 수 있었다. 나도 어깨너머로 익혔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언제나 1등이었다. 월말고사 후에는 주산 실력으로 친구들의 성적을 정리해서 선생님께 드렸다. 그렇게 선생님을 돕던 나는 내 성적이 너무 낮게 나와서 담임 선생님서에게 이상하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느닷없이 나를 교실로 끌고 가서 사정없이 때렸다. 나는 주판과 주먹으로 구타당했다. 쓰러진 나를 발로 밟았다. 나는 여기저기 쑤시는 몸을 이끌고 어깨가 축 쳐진 채 터벅터벅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불편한 몸으로 농사를 직접 지으실 수 없었다. 그날은 일꾼들의 참을 만들고 계셨다. 아버지는 얼굴에 피범벅이 된 나를 보더니 누가 그랬느냐고 물으셨다. 내가 선생님이라고 말하니 절룩거리는 목발로 마을로 쏜살같이 뛰쳐나가셨다. 마을 점방에서 주인에게 선생님을 불러오라고 말하고 기다리다가 쓰러지셔서 세상을 뜨셨다.     

나는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힘없이 걸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할 수 없었다. 너무 어렸다. 4남 4녀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부산에 사는 누나에 얹혀살았다. 공부만이 도피처였다. 전학 후 처음 시험을 보았는데 반에서 16등을 했다. 전과 살 돈이 없어 이 친구 저 친구들에게 전과를 빌려서 공부했다. 두 달 후 시험에서 전교 2등이 됐다.           

-고단한 삶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굶어 죽는 일이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월사금을 낼 수 없았다. 고등학교 때는 매혈로 학비를 충당했다. 거처가 없어 경비를 하며 잠자리를 해결했다. 먹을 것이 없었다.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했다. 코에서 코피가 아니라 핏덩어리가 쏟아졌다. 장학생으로 전남대 화공과에 들어갔다. 내 사정을 들은 총각 교수님이 자기 집에서 같이 지내자고 했다. 졸업 후 대기업에 취업했다 서울의 회사였는데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회사를 나왔다.      

중이 되기로 결심하고 절에 들어갔다. 2년간 중으로 살았다. 교수님이 찾아왔다. 다시 공부하자며 설득했다. 석사 공부를 했다. 박사학위 공부중 결혼했다. 실업계 고등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광주 최고의 꼴통들이 모인 학교였다.

아이들은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담임을 맡았는데 출석하는 아이들이 5명 내외였다. 술과 담배는 기본, 교실바닥에 찍찍 침을 뱉었다. 말도 안 들었다.

나는 아이들을 변화시키려고 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다른 선생님들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충고를 했다. 나는 밤마다 심하게 잠꼬대를 했다. 

아이들을 질책하는 소리였다. 아내가 걱정했다. 몇 달긴 교사생활을 하다가 자진해서 나왔다.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러 대학에 시간강사에 신청했는데 떨어졌다. 마침 교육청에서 교사 모집 공고가 나서 지원했다. 광주의 150여 개 고등학교 중에서 하필이면 그 실업계 학교에 배정됐다. 아이들은 고 3이 되어있었다. 교사들은 퇴직한 줄 알았는데 휴직이었나며 농을 했고 아이들은 비아냥 거렸다.     

기적의 시작, 6월 밤의 불청객      

6월 초 저녁, 잠자리에 들렸는데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을 열러 보니 우리 반 학생들이었다. 자그마치 8명 막무가내로 들어왔다. 

냉장고에서 수박을 꺼내 주었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씨를 바닥에 그냥 뱉었다. 철 모르는 6살짜리 딸은 재미있다며 방글방글 웃었다. 교실에서 침 뱉던 스타일 그대로... 아이들은 집에 가지 않았다. 사실 갈 집이 없었다. 그날부터 아이들과 동거가 시작되었다. 우리 집은 10평짜리 사글세 주공아파트였다.     

아내는 아이들 도시락을 싸주었다. 빨래도 해주었다. 중간고사 시험이 다가왔다. 이 학교 학생들에게는 3 베수로 문제를 알려주고 시험 보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력미달로 아무도 졸업하는 아이들이 없어서 하는 고육지책이었다. 자페를 앓는 한 명을 빼고 아이들에게 문제를 가르쳐주었다. 정답도 알려주고 외우게 했다. 시험 결과 이 아이들이 전교에서 1등부터 7등까지 차지했다 장학금을 1인당 80만 원씩 받았다. 여름방학이 되었다. 늦잠 자던 아이들이 새벽 네시에 일어나 어디론가 나갔다. 알고 보니 주유소 알바를 위해서였다. 놀라운 것은 오후에는 기능사 시험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실업계고는 전교 7% 내 성적과 기능사 자격증이 있으면 특례입학이 가능하다. 아이들은 장학금과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준바흐고 있었던 것이다. 기말고사에서 아이들 중 6명은 올백을 맞았다. 1명은 1개를 틀려서 전교 2등이 되었다.     

시험 결과를 보고 아이들과 저녁을 회식하러 가는 길에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았다. 경찰서에 가보니 다른 아이들이 경찰 오토바이 3대를 훔쳐서 달아나다가  붙잡혔다. 경찰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경찰서에 가두라고 한다고 하소연하다.      

선생님이 잘 지도해달라고 하면서 풀려났다. 집에서 지내던 7명이 집에 오더니 경찰 오토바이 사고 친 녀석들을 손 봤다고 하길래 때렸냐고 물었다. 

“아뇨 저희들이 나가고 그 녀석들이 선생님 집에 들어오기로 했어요 “ 한다.

멤버 교체였다. 그렇게 새로 들어온 8명과 한 녀석 포함해서 9명 그리고 가족 3명이 10평짜리 아파트에서 또 5개월을 살았다. 그렇게 나가고 들어가고 하면서 우리 집에서 생활한 아이들이 모두 707명이다.     

그중 한 아이가 스승의 날에 성경을 선물했다. 

너석은 나만 보면 전도를 했다. 나는 이를 계기로 기독교에 입문하게 됐다.     

- 선생님과 30년 만의 화해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선생님에 대한 분노가 표출되는 계기가 있었다.

대학 때 과외를 하던 고등학생이 사고를 쳐서 학생의 어머님과 통화했다.

자기는 바쁘다며 삼촌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 삼촌이 바로 그 선생님이었다.

서로 알아보았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 나는 인사했다. ”너 로고나 똑바로 좀 가르치지 “ 대뜸 나를 나무랐다. 분노가 역류했다. 그날 이후 나는 잠을 자면 잠꼬대를 했다. 아내는 잠꼬대가 선생을 욕하는 내용이라고 했다.      

세월이 흘러 선생님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했다.”무슨 일로 만나고 싶은데” 예나 같은 말투였다. “꼭 만나야겠습니다”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만난 자리에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내 마음의 미움과 분노도 드러냈다. 처음에는 자기도 첫 부임학교였고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다는 자기변명을 했다. 그러더니 오래전 일이어서 잘 기억이 안 난다며 하다가 용서를 해달라고 했다. 나는 용서할 수 있는데 우리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아버지 산소에 같이 가서 용서를 구하라고 했다. 형에게 전화하자 형들은 이미 용서했다고 했다. 선생님은 나와 같이 아버지 산소에 갔다. 선생님은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었다. 나는 선생님에 대한 분노가 치유되었다. 자유로워졌다.     

학교에서 교육청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관내에 사건사고가 많았다 재직하는 10여 년 동안 100여 명의 꽃 같은 아이들이 자살했다. 우울증이 왔다. 믿는 형과 누나들이 와서 눈물로 기도했다. 교인들도 중보기도를 했다. 나는 1년 반 만에 회복되어 지금은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남은 평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다.     

<소감>     

아버지의 급락한 죽음으로 가정이 몰락하면서 10살짜리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이 눈물겹다. 한 편의 감동적인 영화다. 가난과 차별이라는 역경 속에서 포기하지 않는 생명력과 인내력에 찬사를 보낸다.     

이 감동의 스토리는 총각 교수가 그 시원(始原)이다. 사랑의 물줄기의 발원지이다. 이 분의 관심과 사랑과 수고와 헌선이 기적의 씨앗이 되었다 그 놀라운 씨앗은 박주정 교육장의 마음의 텃밭에 뿌려졌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첫째, 재정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 둘째, 사랑의 나눔과 섬김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 물줄기가 흘러 707명의 문제아들이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 선순환은 박주정 교육장이 제자를 통해 구원의 세게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은 언제나 행복하다.

언젠가 영화가 나온다면 가족들하고 함께 관람하고 싶다. 

제목은 ‘미러클 707’로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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