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사정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첫째 나미가 꼬리를 높이 치켜세우고 어슬렁거린다. 엊그제 급하게 온 본가에 이제는 적응한 듯 여유롭고 태평하다.
나미는 반년쯤 전, 이곳에서 한 달쯤 산 적이 있다. 그 기억이 있는지 금방 익숙해져서 냉장고 위든 스탠드 에어컨 위든 상관하지 않고 폴짝폴짝 뛰어올라간다.
당당한 나미와는 달리 둘째 제르는 조금 풀이 죽었다. 그저께 급하게 구토로 병원에 다녀와서 그런지, 이 집이 낯설어서 그런지 모른다. 둘 다 일수도 있다. 쇼파와 반상, 식탁 아래를 오가며 지하 고양이를 자청한다.
24시간 정도 숨어 있었을까. 나미를 따라 제르가 마루로 나왔다. 몸을 죽 뻗은 제르가 말똥말똥하니 나미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하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에 나미가 어떤 얼굴을 보여 주었는지는 모른다. 내게는 등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자기 꼬리를 한껏 치켜세운 나미는 당당하게 세상에 분홍빛 꽃주름 두른 그곳을 내보이며 모델 워킹으로 거실을 활보했다.
나를 보아라!
괜찮아!
안전해!
...하고 외치기라도 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다정하게 털을 골라주고서 쿨하게 가버리는 나미...
그리고 이제 제르는 마음껏 거실을 탐험한다.
그래, 좋아.
이곳은 안전하단다.
맘껏 돌아다니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