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회사에 출근할 날이 이제 나흘밖에 남지 않았다. 육년간 다녀오던 회사를 이제 갈 수 없게 된다는 감각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모호하고 희미하고 애매한 것이 뭉클뭉클 이상할 뿐이다.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장소. 처음으로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던 곳.
첫 직장은 내게 엄격하고 매서우면서도 따뜻한 곳이었다.
이미 저질러버린 일이지만 조심히 돌이켜본다.
그림을 그린다고 커다란 모니터형 타블렛을 샀다.
삼백만원에 가까운 금액을 현금으로 지불했다.
27인치 거대한 모니터는 책상 위에 올라가지 않았다.
책상을 사려니 방에는 놓을 공간이 없었다. 월세 25만원을 지불하고 방을 빌렸다.
책상과 모니터, 컴퓨터와 이젤, 스케치북과 화구를 늘어놓고 나니 훌륭한 작업실이 되었다.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건 나밖에 없다. 졸라맨처럼 어색하게 비뚤비뚤한 선을 그어나가는 나는 아직 너무나도 부족하다. 어울리지 않는 사치스러운 도구를 이용해 어설프게 선을 긋는다.
한 번 긋고 지우고, 다시 긋고 지우고, 아직 갈길이 너무 멀어서 한숨이 난다.
직장을 그만두며 아쉬운 건 돈을 그리 많이 모아두질 않았단 것이다. 짧은 인생 후회 없이 이것 저것 배우면서 돈을 많이도 썼다. 몇 번 할 일도 없었던 영어 회화를 한답시고 비싼 영어 학원에 다니고 과외를 받았다. 외국어 실력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는다며 이런저런 교재를 사고 강의를 결제했다. 막상 그것들을 전부 값어치를 다할 만큼 만끽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오히려 비싼 교재를 샀다! 하고 만족하고 쌓아둔 것이 대다수다.
만화를 그린다. 서툰 선을 그어 동그라미를 만들고 타자를 쳐서 대사를 집어넣는다.
표정을 살린답시고 거울을 보고 괴상한 표정을 짓고 열심히 따라 그린다.
무엇을 할 때 교재와 강의부터 사고 보는 내 버릇은 어디 가질 않아서,
디자인, 만화 스토리 강좌, 시나리오, 드로잉, 그래픽 프로그램 관련 책들은 벌써 책장을 꽉 채웠다.
새로운 일을 한다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자고 결심했지만
무슨 일을 해도 나는 그냥 나일 뿐인 것이다.
아직은 멀었다.
그래도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지리라 믿는다. 하루 한 걸음씩, 산을 올라가듯 꾸준히 올라가야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에 맘껏 담아낼 수 있게, 더 실력을 길러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