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라하 Sep 09. 2016

내가 치매에 걸린다면

마음만은 이미 만화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그릴까 고민하다가 짧은 시간 내에 체계적으로 실력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고전 인체드로잉 책을 구했다. 



서점에서 산 책은 다음날 바로 배송되었다. 놀랍다, 로켓배송. 




정신과 간호사로 일하며 치매 할머니를 많이 만났다. 

우리 외할머니도 친할머니도 치매셨고 아버지께서도 경도인지장애진단을 받으셨다. 

아마 낮지 않은 확률로 내게도 치매가 일어나겠지, 

아무것도 모르고 육체만 남아있을 나를 생각하면 너무나 두렵다. 




아주 고우신 할머니가 계셨다. 

그녀는 이름만 대도 아는 유명한 여배우였다. 


보통 치매 할머니들이 하는 행동은 비슷하다. 옷을 꺼내 개어 정리하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요리를 하려고 한다.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가 집에 가야 한다고, 여기가 병원인 줄도 모르고 울부짖는 그 울음은 보통 한 가지로 귀결된다. 가서 밥 해야 해. 우리 아들, 딸 밥 해먹어야 해. 지금 빨리 가야 해. 새벽 세시건 다섯시건 상관없이 일어나서 가야 한다고 하신다.


그런데 그녀는 달랐다. 평생을 방송국에 머물러 있던 그녀는 간호사들을 이제 막 시작한 신입 여배우라고 생각했다. 예쁜 간호사에게 넌 좋은 배우가 될거야 하고 격려의 말을 해주기도 하고, 다른 간호사에게 넌 개성적인 외모라서 괜찮다고 위로를 해주기도 했다. 눈앞의 간호사를 자신이 장학금을 준 신입 배우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잘 컸구나 하고 자랑스러워 했다. 




그래서 내가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해 보았다. 


여태까지 나는 내가 보이지 않는 환자들에게 약을 준다거나, 

들리지 않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내가 입원한 병동의 간호사들은 그 행동들을 보며 웃겠지? 

수건을 잡고 혈압계라고 우기면서 누군가의 혈압을 측정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십 년, 이십 년이고 그림을 그리다보면 아마도 달라질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어도, 인지 기능이 저하되고 손가락으로 뭔가 잡는 것이 서툴러도 종이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치매에 안 걸리는 게 제일 좋겠다 '' 





열심히 그리고 있다.

아직 멀었다.

작가의 이전글 직장을 그만두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