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들

by 이란

깨어진 유리의 조각들이 살갗을 파고든다. 그 조각들을 끄집어낼 때마다 피가 쏟아진다. 상처는 아물 수 있다고 말한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남은 흉터는 세월과 함께 옅어지리라. 끝낸 관계를 돌아보며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트라우마는 피해야 하는 대상이지 반가운 추억이 아니다. 여린 심장을 부여잡고 다시는 상처 받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 상처로부터 걸어나오는 것은 길고 어두운 터널을 걷는 것과 같다. 그것은 거쳐야 하는 과정이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고 싶은 그 시간 속에서 마주하는 것은 가면 속에 숨긴 진심과 거짓말이다. 사람들은 사회생활 속에서 쉽게 그리고 자주 거짓말을 한다. 그것이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라 믿으면서 때로는 선의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그 거짓말의 대상은 그 거짓을 알지 못한다. 상대를 믿고 자신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함께 할 시간을 생각한다. 하지만 아주 간단한 진실은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가면은 벗겨지게 마련이고 영원할 듯 보였던 관계는 깨어진다. 마치 유리처럼. 아름다웠던 추억은 거짓이란 이름의 꼬리표를 달고 영혼에 비수처럼 박힌다. 처음부터 무언가를 설명하고 그 가면놀이를 계속할지 선택할 권리라도 주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랬다면, 아무도 그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관계의 시작이 이용하고 버려지는 일회용품과 같다면, 그 누구도 그 대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혼자이기를 바랄 것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상대를 향해 가면을 쓰고 웃고 있다면, 그 사람이 나쁘다고 손가락질 해야 할까. 이제는 그렇게 하지도 못할 것 같다.


내 안에서 소멸되는 무언가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과 신뢰인데, 그 모든 기반이 무너지고 나면 나 역시 그들처럼 그럴 수 있을까. 가면을 쓰고 상대로부터 필요한 것을 얻고 버린다. 중요한 것은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져다 줄 무언가이다. 순진할수록 빼앗는 것은 더 쉽다. 쉽게 믿기 때문이다. 갖고 있는 내면과 외부적 조건을 그렇게 다 빼앗기고 나면, 폐기된다. 그 누구에게도 쓸모 없는 모습이 되어서. 가져간 상대는 더 화려한 곳에 우뚝 서서 망가진 이를 내려다 본다. 속으로는 네가 바보라고 비웃으며. 사랑이든 우정이든 기본적인 신뢰에 기반한 관계는 서로를 동반 상승시킨다. 하지만 나약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내면은 쉽게 그러한 선택을 하지 못한다.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진 관계에 대해 다시 돌아가 시작하자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답해야 할까. 시작하기 전에 상대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헤아려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관계로 인해 종국에 내가 잃게 될 무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눈 앞에 달콤함에 인생을 쏟아붓는 것은 마치 자살 행위와 같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고 상대에게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믿을 이를 찾기 힘든 세상 속에서 맨 얼굴을 드러낸 채 순진하게 살라는 충고도 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그 가면 속 마음이 최소한 상대를 망치는 선택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본래 그러한 마음이 아니었어도 결과적으로 그러한 결과를 낳는다면 진지하게 멈추어야 한다. 인생은 한 번뿐인 소중한 여행이기 때문이다.


절실한 눈으로 누군가 나를 바라보아도 이제는 그대로 지나칠 수 있을 것 같다. 그 선택이 종국적으로 파괴에 닿는다면. 신도 아닌데 그 모든 것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과연 세상에 완벽한 선택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 그 가면의 정체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고자 상대를 파괴한 그 선택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해가 용서에 닿는 것은 아니다. 깨어진 관계는 유리처럼 파편화된다. 그것은 아름다운 장면들이 상처로 변질되는 과정을 거친다. 아문 상처 위에 또 다른 시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신뢰와 책임이 필요하다. 단지 뜨거운 감정만으로는 부족하다. 편안한 사랑이라는 특별함이 내 삶에 깃들지 못한다면, 그럴 수 없다면, 그 어떠한 충동적인 선택도 하고 싶지 않다. 시간이 가져다 준 현명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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