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2024년 4월 통권 297호 게재
장성희(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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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비추는 밤바다는 은빛 거울처럼 빛난다. 까만 밤하늘에는 구름이 흐르고 달빛은 잦아들다 순간적으로 번져 나간다. 일렁이는 파도는 먼 곳에서 수평면처럼 일률적으로 보이지만 빛은 그 굴곡을 따라 매순간 다른 각도에서 반사된다. 바다의 호흡을 듣는다. 거칠게 또는 부드럽게 부딪히고 부서진다. 낭떠러지 끝에 선채 그 모든 풍경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뺨을 스친다. 순간적으로 하얀색 목도리를 매만진다. 목도리를 당겨 그 안쪽으로 얼굴을 좀 더 파묻고 싶다. 아름다움과 따스함에 대한 갈망은 본능적인 것일까. 다른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 본적은 없지만 은수 자신에게는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녀는 이 목도리와 같은 형태로 남색 목도리를 하나 더 만들어 진혁에게 주었다. 웃으며 선물을 풀어본 그는 그 이후로 한번도 그 목도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목에는 크리찬디올이 멋스럽게 둘러져 있었다.
그의 방에는 박스 그대로 그 목도리가 보관되어 있었다. 그는 왜 선물 받은 목도리를 하지 않을까. 은수는 그 목도리가 버려지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해 보였다. 그는 그것을 아끼는 보석처럼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실로 정성껏 만든 목도리인 것은 맞다. 은수가 만든 목도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진혁에게 줄 그 목도리의 남색 실은 은수가 며칠을 여러 가게를 찾아다니며 직접 고른 촉감과 색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목에 두른 적이 없다.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큰 회사에 다녀서 안정된 삶을 살겠다던 그 목표대로 진혁은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이름 있는 학교, 유명한 회사, 그리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경제적 능력까지 남들이 선망하는 것을 갖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은수가 만든 목도리는 그런 진혁의 욕망을 채우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 목도리를 자신이 아끼는 공간에 자신만을 위해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수는 삭이듯 스스로에게 물었다. ‘진혁은 그가 손에 쥔 것들을 정말 원하는 걸까.’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진혁은 청첩장을 내밀었다. 은수는 그에게 프로포즈를 받은 적이 없다. 그 청첩장에는 다른 여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이별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은수는 진혁의 두 눈을 응시했다. 단단하고 차가워 보였다. 처음 사귀자고 했을 때에도 그는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은수는 그때 진혁이 자신에게 진지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바뀌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속이지 않고 알려줘서 고마워.” 석 달 전 진혁에게 연락이 끊어진 후로 체념하고 있던 은수였다. 그렇게 한달 동안 감기를 앓던 은수는 겨울바다를 마주했다. 바다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바람은 살을 에일 듯이 매서웠다. ‘물속은 좀 더 따뜻할까.’ 은수는 자신의 생각이 어리석음을 알고 있었다. 지금 이곳보다 더 최악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물밑 바닥까지 떨어지면 그보다 나쁜 것은 없지 않을까.’ 그녀는 손을 뻗어 허공에 그의 얼굴을 그렸다. 부서지고 싶었다. 망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아래로 하염없이 떨어졌다. 더 어둡고 더 차가운 그가 없는 곳을 향해서.
악몽을 꾸었다. 일어나 식은 땀을 닦고 나면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진혁과 헤어진 것이다. 은수는 매일 진혁을 자신의 삶에서 지워냈다. 더 이상 인스타그램에서 진혁을 팔로잉하지 않는다. 자신의 인스타그램에서 그와 관련된 사진들을 내렸다. 대학 때 동아리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만이 남겨졌다. 그때 그곳에서 은수는 진혁을 처음 만났다. 재수를 하고 군대까지 다녀와 복학한 그는 그녀보다 3살이 더 많았다. 그는 재수하던 시절이 끔찍했다고 말하곤 했다. 그 시절의 그의 사진을 보며 은수는 한없이 웃었다. 집과 독서실만을 오가며 아침, 점심, 저녁을 잘 챙겨 먹은 덕분에 그는 지금보다 두 배는 더 살이 붙은 듯 했다. 합격 후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때까지 살을 뺏다고 했다. “누가 폭탄이랑 사귀자고 하겠어?” 책에 파묻혀 귀엽게 웃는 그의 사진을 손에 쥔 은수를 향해 그가 말했다. “너는 내가 살이 찌면 헤어지자고 할거야?” 그는 짓궂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은수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왜 자신에게 고백했는지를 물어야 했던 것이다.
은수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움푹 패인 듯 꺼져버린 눈두덩이는 흡사 귀신을 보는 듯 했다. 며칠을 앓았다. 먹지도 씻지도 못했다. 온몸이 물에 젖는 솜처럼 무겁기만 했다. 작은 움직임조차 그녀에게는 버겁기만 했다. 방안은 하루 온종일 밤이었다. 암막 커튼을 치고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수는 벽에 기대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이렇게 무너질 수 없었다. 커튼을 걷자 방 안으로 햇살이 쏟아졌다. 그녀는 빛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컵 안의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했다. 그리고 힘을 내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벽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꺼 놓은 핸드폰을 켜자 문자와 카톡이 쏟아졌다. 그녀는 무시한 채 어플로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화장실을 향해 걸었다. 샤워를 마치고 핸드폰으로 주문한 음식이 도착했음을 확인한 후 현관문을 열었다. 소고기죽이었다. 갑자기 음식을 삼키자 목이 아팠다. 신물이 올라왔다. 다시 물을 마셨다. 음식이란 때로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회사는 휴직 상태였다. 나사가 빠져 고장난 듯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은수는 휴직계를 제출했다. 12월이었다. 그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무기력과 공포가 찾아왔다. 9월경 연락이 끊어졌을 때 그를 염려하다 돌아올 것이는 기대로 버텼다.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인터컨티넨탈 호텔이라고 했다. 결혼을 하기 위해 그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10년을 사귄 남자였다. 그를 알고 그의 가족을 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해서 지금까지 모든 순간을 함께 했다. 그 시간들이 청첩장 한 장으로 부서진 것이다. 은수는 진혁을 붙잡으려 구차하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인생을 다른 여자와 시작한다고 해도 어차피 그의 선택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의 과거가 되는 기분은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방 안에 펼쳐진 청첩장이 놓여 있었다. 은수는 그것을 집어 구겨버렸다.
차를 타고 마트로 향했다. 쇼핑은 늘 기분을 새롭게 바꿔준다. 겨울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저녁은 직접 만든 요리를 먹고 싶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이들. 은수는 ‘베인다’는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감정의 날에 베인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상흔은 때로 일상을 무너뜨린다. 함께 좋은 회사에 취직했을 때에는 그와 죽을 때까지 같이 하는 긴 여정을 꿈꾸었다. 결혼이라는 것은 그 여정 중 하나의 작은 절차에 불과했다. ‘왜 다른 선택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은수는 카트에 물건을 담으며 생각했다. 마트의 물건 중 1인분은 없었다. 갖가지 음식을 식탁 위에 마음껏 차리리라 마음먹었다. 생각해보면 은수 자신만을 위해 요리를 한 기억이 없었다. 그녀는 진혁이 좋아했던 음식을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익숙했던 것들이 차지하던 시간과 공간을 강제로 삭제해야 했다. 십 년이었다. 그 기억을 통째로 버려야 하는 것이다.
마트에서 산 음식들을 냉장고에 채우고 방을 청소했다. 찢어진 청첩장부터 쓰레기통에 넣었다. 청소기의 소리는 꽤나 시끄러웠다. 하지만 은수는 그 소음보다 더 크게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였다. 프로그램은 중요하지 않았다. 적막을 찢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창문을 열었다. 해 질 녘의 겨울 밤공기는 스산하리 만치 차가웠다. 진혁에 관한 모든 것을 지워내고 싶었다. 이불을 세탁하고 건조기에 넣었다. 그리고 물걸레로 청소를 끝냈다. 샐러드와 해산물 파스타를 만들었다. 그에 어울리는 피클도 만들었다. 스테이크에 가니쉬를 얹었다. 쾌적한 공간에 맑은 공기가 흐르는 밤이었다. 음식을 만드는 부산한 손길은 현실을 망각하게 한다. 은수가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텔레비전을 끄고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틀었다. 따뜻한 치아바타와 올리브유에 발사믹 식초를 첨가한 드레싱을 곁들였다.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천천히 온몸에 퍼졌다.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공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은수는 생각했다. 하지만 진혁은 그녀와 달랐던 것이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 질문을 바꿔야 했다. ‘정확히 어느 지점부터 그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일까?’ 진혁이 처음 입사하던 날에 그와 저녁 식사를 했다. 은수는 그의 지갑이 바뀌었음을 깨달었다. 지갑에는 구찌 로고가 선명했다. “비싸지 않아?” 은수가 물었다. “이 정도는 살 수 있어.”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그가 입은 옷부터 시계까지 모든 것이 명품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좋은 회사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해 보이지 않았다. 집을 사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목돈이 필요하다. 저축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은수의 생각에는 진혁의 씀씀이가 커 보였다. 은수가 그렇듯 그는 부잣집 아들이 아니었다.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재수까지 했던 진혁의 지난 시간들을 헤아리며 은수는 그를 이해하려 했다. 그날의 서울 야경은 아름다웠고 은수는 일을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 뒤 진혁은 벤츠를 샀다. 스테이크를 씹자 육즙이 퍼졌다. 은수는 과거라는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진혁과 만든 추억 속에 각자 다른 꿈을 꾸고 있었고 결국 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