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2024년 4월 통권 297호 게재
장성희(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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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자르려고 미용실에 들렀다. 은수를 담당하는 헤어 디자이너는 거울 속 은수를 바라보며 연신 웃고 있었다. 은수는 그 웃음이 한없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머리를 자르겠다고 하자 그는 다듬는 것이냐고 묻는다. “아니오.” 은수가 답하자 그는 원하는 기장을 확인한다. 짧게 더 짧게. 은수는 단발머리를 원했다. 수십 센티미터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펌을 하는 동안 잡지를 보았다. 진혁이 턱시도를 입은 채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평범한 직장인이 결혼을 한다고 여성지에 실릴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결혼하는 여자는 범인이 아니었다. 대기업 총수의 딸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것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온 그녀가 아버지의 회사에서 운명처럼 진혁을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러다 그녀가 첫 사랑이라는 진혁의 인터뷰 기사에 은수는 헛웃음이 나왔다. 재수를 해서 학교를 바꾸고 굶어서 살을 빼고, 취직해서 명품을 사듯 여자 또한 그렇게 바꾼 것이다. 은수는 진혁에게 결혼 전의 소모품이었던 것이다. 은수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잘 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겠다는 꿈이 있었을 뿐이다. 그 꿈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진혁과 다를 뿐이었다.
드라이를 마친 후, 미용실의 거울 속에는 전과는 다른 은수가 서 있었다. ‘다른 남자를 만나면 되.’ 은수는 간단하게 답을 내렸다. ‘나에게 맞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되는 거야. 사랑은 언제든 끝날 수 있고 시작될 수 있다.’ 하지만 절망은 도돌이표처럼 멀지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내가 했던 것이 사랑이 맞을까?’ 은수는 속았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부터 계획적으로 이용당한 기분이었다. 마치 잡지 속의 저 잘난 여자처럼. 시간은 흐르고 삶에는 명암과 굴곡이 존재한다. 진혁이 아플 때마다 죽을 만들어 주었던 것은 은수였다. 회사에서 일이 안 풀린다는 투정을 들어준 것도 은수였다. 진혁은 은수가 필요하다고 했고 은수는 그의 필요를 채워주는 소중한 존재로서 자신을 규정했다. 은수가 아플 때에도 진혁이 곁에 있었다. 그녀의 생일을 함께 한 사람도 진혁이었다. 그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괜찮아? 진혁이 그럴 줄 누가 알았겠니? 너희 둘이 얼마나 예쁘게 지냈니? 갑자기 그렇게 돌아서서 결혼을 하다니……청첩장 받은 내가 당황스럽다.” 대학 동기였다. “잘 다녀와.” 은수는 웃으며 답했다.
사랑은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 간극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은수는 진혁의 야망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처럼 그도 그러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현실에 부딪히고 좌절하며 다시 일어나 나아가는 삶. 그 삶에 은수는 그를 응원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성공이란 외로운 것이니까. 그래서 그의 재수 시절도 볼살이 통통한 어린 시절의 사진도 단지 귀여울 뿐이었다. 사랑이란 빛과 그림자를 함께 끌어안는 것이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곁에서 행복하다고 한다면 그의 남은 삶을 축복하는 것이 깔끔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나란 존재가 결혼 전에 스쳐 지나가는 여자였다면 다른 문제인 것이다. 다른 곳에서 서서 진혁을 응시하다 어느덧 베란다에 섰다. 길을 밝히는 가로등의 전구들이 별처럼 반짝인다. 꿈속의 바다처럼. 은수는 몸을 기울인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따라 추락의 충동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꿈속의 꿈. 깨진 거울의 파편에 베이듯 매일 진혁은 그 꿈에 베었다. 쏟아지는 햇살 사이에 서서 푸르른 여름을 본다. 하얀색 커튼 자락이 바람결에 흩날린다. 진혁은 커피 머신에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해 마셨다. 일상은 평화롭다. 그러나 진혁은 은수라는 그림자에 여전히 휩싸여 있었다. 결혼 전 은수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진혁이 은수에게 청첩장을 건넸을 때 어쩌면 은수가 자신의 결혼을 축하하고 그녀에게 어울리는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진혁은 최악의 결론으로서 은수에게 가장 나쁜 남자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좀 더 반짝이는 삶을 택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진혁은 누구나 그렇다고 생각했다. 대학교에서 은수에게 고백했을 때 진혁은 그녀가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혜진을 만난 순간 은수보다 더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갖고 싶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먼저 출근! 오늘 바빠서.’ 혜진의 문자였다.
진혁은 꿈 속에서 은수가 된다. 순수하게 진혁을 사랑하는 한 여자가 내면적으로 붕괴된 채 자살을 꿈꾼다. 그 과정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진혁에게 전해진다. 만족이라는 것에는 100%가 존재하지 않는다. 은수의 목도리가 그러했다. 예쁘긴 하지만 회사에서 직장 동료를 만날 때 그 목도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목도리를 누군에게 받은 것인지 밝히는 것은 더욱 더 하고 싶지 않았다. 구속은 진혁의 바람이 아니었다. 만약 더 멋진 남자가 있고 은수가 그 남자를 사로잡을 수 있다면 은수는 진혁을 떠났을 것이다라고 진혁은 믿었다. 만약 혜진이 진혁의 청혼을 거절했다면 진혁은 은수의 곁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보다 더 나은 선택지는 없기 때문이다. 진혁은 자신이 잘못된 것이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누구나 다 주인공이 되어 화려한 삶을 꿈꾸지 않나! 머무는 것은 실패한 자들 뿐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넓은 방 안을 바라보며 그는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만하면 괜찮아.’ 하지만 꿈 속의 목소리는 그를 향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결혼 전에 타던 차는 그대로였다. 창 밖으로 풍경이 스치고 바흐의 미뉴에트가 흘렀다. 녹음이 우거진 가로수를 따라 경쾌하게 달렸다. 은수는 함께 할 미래에 대해 말하곤 했다. 그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지금의 차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진혁은 다르게 생각했다. 이 차에 어울리는 인생을 만들고 싶었다. 목표를 낮출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분수에 맞는 수준이라는 것은 실패한 자의 넋두리였다. 주식을 투자하든 그 밖에 다른 무엇을 해서든 삶의 수준을 끌어 올려야 했다. 지금의 성공에 안주하고 싶지 않았다. 진혁에게 은수 또한 현재 상태의 소유였다. 상황이 바뀌면 선택은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나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은수 또한 진혁이 자신의 수준에 맞기 때문에 만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상황이 바뀌면 그 선택도 달라진다. 쇼윈도에 걸린 물건을 쇼핑할 때처럼 진혁은 은수를 만났던 것이다. 더 값비싼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은수가 진혁의 선택 때문에 죽음을 택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은수의 장례식을 마친 어머니가 결혼 전 진혁을 찾았다. 카페에서 은수의 어머니는 그녀의 일기장을 건네 주었다. 유품이라고 했다. 진혁은 은수의 목도리처럼 그 일기장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저는 곧 결혼을 합니다.” 진혁은 받기 어렵다는 뜻을 에둘러 말했다. 은수의 어머니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숨을 고른 후에야 말을 이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전해달라는 말을 남겼으니 내 할 도리를 하는 것일 뿐일세. 버리든 말든, 자네 몫이야.” 어머니는 냉정을 되찾으려는 듯 물을 마셨다. 진혁은 식사 초대를 받아 은수의 어머니 집에 간 적이 있다. 해물탕, 갈비, 잡채 등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진혁은 몇 번씩 음식이 맛있다고 했다. 은수의 어머니는 원망스러운 듯 진혁을 바라보았다. “저는 은수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줄 알았어요.” 진혁은 그 살기어린 눈빛을 피하고만 싶었다. “그래, 어리석은 것은 내 딸이겠지.” 은수의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 값을 결제하고는 카페를 나섰다. 그렇게 은수의 일기장이 진혁의 손에 들려졌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가 사진 동아리에서 수줍게 고백하던 때를 떠올린다. 설렘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는 내게 일상이 되어 있다. 매일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고 그의 삶의 중요한 순간에 함께 한다. 그와 함께 할 남은 삶을 꿈꾼다. 가을 여행처럼, 그 과정은 때로 아주 구체적이다……석 달째 그에게서 연락이 없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친구들조차 그에게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그의 집에 찾아갔다. 그의 어머니는 만날 수 없으니 오지 말라는 말만 하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다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가 나를 떠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십 년이면 그럴 만도 하다. 내가 지겨워진 것이라 헤어지겠다는 말을 못해 연락을 끊은 것이라면 보내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평생 함께 하는 인생이 설렘만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그를 사랑한다. 그래서 보내줘야 한다면 그것이 답이라면 보내줘야 하겠지만.’
일기장의 은수는 이미 이별을 예상하고 있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무엇이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을까.’ 진혁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수를 홀로 둔 그 석 달 동안 진혁은 혜진에게 고백을 하고 사귀고 있었다. 은수의 전화는 회사든 집이든 핸드폰이든 피했다. 청혼을 하고 결혼이 확정되었을 때 은수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이별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혜진의 모든 것이 진혁을 사로잡았다. 자신이 바라는 성공한 인생이 그녀에게 있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진혁은 공평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었다.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력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운이었다. 혜진은 아버지가 이룬 모든 것을 물려받을 외동딸이었다. 진혁의 눈에 은수는 희미해지고 있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을 노력으로 얻는 것은 어리석기 때문이다. 목표를 낮추는 것은 더욱 바보 같은 짓이다. 하지만 은수의 사랑은 그녀를 바보로 만들고 있었다. 진혁은 일기장을 넘기며 생각했다.
“나는 자기가 욕심 많은 사람이라서 좋아.” 잘 익은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며 혜진이 말했다. “알고 있었구나.” 진혁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진혁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 여자를 이겼다고 생각해.” 아스파라거스를 접시 한 켠으로 밀어내며 혜진이 말을 이었다. 그녀는 채소를 싫어한다. 은수와 헤어진 석 달 동안 진혁과 혜진은 미친듯이 서로에게 빠져 들었다. 진혁은 혜진이 필요해 잡고 싶었고 혜진은 은수를 이기고 싶었다. 평생을 함께 할 듯한 십 년 동안의 사랑을 부수고 진혁을 손에 넣고 싶었다. 아이가 생겼다. 진혁이 청혼을 했다. 혜진은 그의 청혼을 받아 들였다. 첫 사랑에 관한 짓궂은 인터뷰 기사도 혜진이 준비한 것이었다. 진혁은 망설임 없이 혜진이 첫 사랑이라고 했다. 지금 그의 눈 앞에 선 자신이 승리자라고 혜진은 의심 없이 믿었다.
“그 여자 죽었어.” “알아.” 혜진이 진혁에게 답했다. 모르는 척 평생을 그렇게 지낼 수 있는 이야기였다. 굳이 꺼낼 필요가 없는 일이다. “자기, 요새 악몽 꾸지 않아?” 말을 마친 혜진은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진혁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필 우리 결혼을 앞두고 죽어서 자기가 힘든 거야. 이해는 하는데 빨리 잊어.” ‘그 편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니까.’ 진혁은 말 없이 물을 마셨다. “다 아는데 괜찮아?” “그 여자가 바보지. 왜 죽어?” 진혁의 말에 혜진이 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진혁은 아스파라거스를 입에 넣었다. 에스프레소의 쓴 맛이든 채소의 씁쓸함이든 상관 없었다. 그 쓴 향만이 진혁에게는 진실로 다가왔다. 설탕이나 마시멜로 같은 달고 부드러운 것들은 부풀려진 거짓에 가까웠다. 이성이 내린 합리적인 판단에 감정이 항상 같은 속도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그 여자에 관한 것이라면 다 버렸어. 나머지는 그냥 가라앉은 앙금이야.” “매일 꾸는 악몽처럼?” “그래, 곧 지나 갈 거야.”
외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혜진은 거실의 소파에 기댄 채 텔레비전을 켰다. 가로등이 반짝이는 정원이 한 눈에 들어오는 거실은 넓었다. 둘이 살기에는 2층으로 된 단독 주택은 넓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 그녀의 아버지가 사 주신 집이다. “곧 손주 볼 텐데, 넓지 않아.” 혜진은 진혁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가지고 태어난 것이 많아서 나누어 줄 수 있는 것 또한 많았다. 승진도 빨랐다. 일을 배워 다른 사업을 할 수도 있다. 기회도 많았다. 진혁을 알아보고 가까워지려는 사람이 늘었다. 물론 그러한 접근이 순수하게 진혁에게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은 이전에 그라면 만날 수 없을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가 다른 위치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혜진과 결혼하여 얻은 결과들이다. 물론 그가 그러한 운과 기회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사라질 수도 있을 신기루와 같지만 진혁은 어리석게 놓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쁜 꿈은 매일 찾아왔다. 은수가 되어 은수의 죽음을 경험한다. 그 슬픈 과정 속에서 진혁에 대한 은수의 사랑, 기대, 그리고 절망이 차례로 스쳐갔다. ‘나는 왜 너처럼 독해질 수 없을까?’ 거울 속의 은수가 묻는다. ‘만약에 네가 나를 철처히 속이고 이용했다고 해도 나는 나대로 사랑한 거니까. 그냥 묻어버려도 그 뿐인데. 나는 왜 자꾸 너에게로 돌아가 네가 나를 사랑했는지 묻고 있는 것일까?’ 거울 속의 은수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또는 바다 앞 낭떠러지에서 스스로를 비춰보다 추락의 충동을 느낀다. 하늘은 아득히 멀고 아름답다. 바닥은 끌어당기듯 가깝다. 집착은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이끈다. 같은 자리에서 매일 죽음을 꿈꾼다. 고통스런 질문이 자의에 의해 끝나는 순간이다. 자살이란 출구가 아니다. 그것은 좀 더 나은 절망이다. 그 문을 통과하면 더 이상 삶에 관한 질문들이 좇아오지 않는다.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어. 그럼 너는 날 지나쳐야 했어. 그런데 너는 나와 시작했지. 그래서 나는 부서져 버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