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오렌지 커피처럼
『계간문예』서로다독 독서포럼을 통해 매달 한 권의 책을 읽고 작가분들과 토론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 내용을 토대로 연말에 참여 작가로서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이『독서가 힘이다10』이다. 12월 16일에 종로에서 출간기념회가 있다.
*이미지는 스와로브스키 도산플래그십 도산파크 3층에 위치한 카페 스와로브스키의 아메리카노이다. 오늘 이곳에서 볼펜을 하나 더 샀다.
《짧은 소설》
오렌지 커피처럼
이란(장성희)
동그란 주황색 껍질로 둘러싸인 달콤하고 상큼한 과일, 오렌지의 과육이 유리잔에 탐스럽게 담겨있다. 그 아래로 진한 갈색 에스프레소가 퍼져 내리고 다시 그 밑에 오렌지 주스가 노란 물감에 약간의 붉은 색을 풀어놓은 듯 고운 빛깔을 드러낸다. 둘은 섞일 듯 섞이지 않는다. 다만 흘러내릴 뿐이다. 나경은 빨대로 조심스럽게 커피를 한 모금 빨아들인다. 바닥에 가라앉은 오렌지 주스와 상부의 에스프레소가 차례로 입안에 퍼진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과 향이 뒤섞인다. ‘더 카페.’ 요새 나경이 중독된 듯 들리는 카페다. 그녀는 오후 3시, 이곳에서 오렌지 커피를 마신다. 라떼의 부드러움도 모카의 달콤함도 오렌지 커피의 달콤하고 상큼한 맛이 더해진 에스프레소의 향을 이길 수 없다. 그 맛과 향의 켜켜이 다른 결을 느끼며 나경은 며칠 전 만난 혜미를 떠올렸다. 혜미는 그레이와 브라운 톤이 느껴지는 에토프 색상의 에르메스 버킨백을 들고 있었다. 어떻게 지내느냐는 혜미의 물음에 늘 그렇지 뭐하고 답했던 자신이 솔직한 듯 쑥스럽게 느껴졌다. 수평선과 수직선의 교차. 나경은 혜미와의 관계를 그렇게 규정지었다.
고등학교 시절, 혜미는 뭐든지 빨랐다. 공부도 연애도. 보통 공부를 하는 모범생은 연애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혜미는 달랐다. 다른 남자 고등학교의 학생과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남자의 인물이며 성적에 대한 이야기가 점심 때마다 반 아이들 사이에 오고 갔다. 연예인 중 누구를 닮았다는 이야기부터 사귀는 중에도 전교 상위권 성적을 유지한다는 이야기까지 퍼졌다. 지각도 결석도 하지 않고 조용히 학교생활을 하는 혜미였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만, 방과 후 그녀의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점심 반찬과도 같았다. 강원도 시골 고등학교에 텔레비전 드라마보다 생생한 볼 거리가 존재했던 것이다. 문제는 수업 시간 중에 일어났다. 혜미가 수업 중에 헛구역질을 하며 화장실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점점 배가 불러오더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혜미는 결국 자퇴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꼬리를 물었다. 낙태 수술을 하고 서울로 전학을 갔다는 이야기부터 유학을 갔다는 이야기까지. 혜미의 아버지는 부자였고 아무도 그녀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그녀 뱃속의 아이였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둘의 결혼을 아이 때문에 허락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인생은 선택이야.” 혜미는 품이 넉넉한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석양의 붉은 빛이 그녀의 등 뒤를 적셨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사물함의 물건을 정리해서 박스에 담았다. 도와달라는 혜미의 부탁에 나경은 수업이 끝나고 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어디로 가니?” “나, 아이를 낳을 생각이야.” 동문서답이었다. 하지만 나경은 혜미가 부모 곁을 떠나려 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넌 너무 어려.” 나경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을 되새겨 보았다. 자신보다 똑똑하지만 그만큼 어리석어 보이는 혜미였다. “책임질 거야.” 혜미는 여유롭게 웃으며 자신의 배를 매만졌다. 나경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섬세하고 예민한 혜미가 아이를 몰래 지우지 않은 것부터가 의도적이었는지 모른다. 숨기려 했다면 충분히 숨길 수 있었다. “생명은 소중해.” 성당의 수녀님이 낙태를 하려는 미혼모의 손을 잡고 해야 할 이야기를 자신의 입으로 꺼내는 혜미를 보며 나경은 더는 설득할 수 없음을 느꼈다. 혜미의 말처럼 낙태는 살인이다.
시장에서 생선장사를 하는 나경의 어머니가 어느 날 가게로 온 편지를 전해 주었다. 가게 안에 딸린 방 안에서 나경은 혜미의 단정한 글씨를 마주했다. 검정 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자와 함께 유학을 떠난다는 이야기였다. ‘고마워.’ 나경은 베이지색 편지지의 마지막 글귀를 떠올렸다. ‘나는 늘 외로웠어. 그 외로움을 지우려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난 것 같아. 아직도 그 답을 찾는 중이야. 이제는 아이와 함께.’ 돈을 벌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수산 시장에 도매 물건을 찾아 나서는 부모님을 보고 자란 나경은 외로움이란 단어가 낯설었다. 그보다는 생존이라는 단어가 더 가깝게 살갗에 닿았다. 단칸방에서 부모님과 함께 시작하는 일상은 외로움보다는 부대낌에 가까웠다. 하지만 혜미는 외로웠던 것이다. 생일날 보았던 정원이 딸린 큰 단독주택 안의 넓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외로움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빨리 사랑을 하고 아이를 가졌다. 유학을 떠난 이후로 혜미에게서 더 이상 편지가 오지 않았다. 나경은 결혼을 했고 삶 속에서 혜미를 지웠다.
가까운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향하는 중에 고급 세단이 멈췄다. 그리고 회색 수트를 입은 중년 여성이 내렸다. 혜미였다. 자신을 알아본 것이 오히려 혜미라는 사실에 나경은 자못 놀랐다. 마치 어제 만난 사이처럼 어떻게 지냈느냐고 다정히 묻는 그녀의 물음에 늘 그렇게 지낸다고 성의 없이 답한 것이 조금은 미안했다.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적당한 시기에 결혼하여 두 아이의 엄마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 준비를 잠시 미루고 그녀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나는 사실 네가 늘 부러웠어.”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혜미의 갑작스런 말에 나경은 당황스러웠다.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던 혜미에게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너는 외로워 보이지 않았거든. 늘 가득차 보였어.” 나경은 고개를 숙인 채 라떼를 마셨다. 외로울 틈조차 없이 치열했던 자신을 가득차게 바라보는 혜미의 시선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섬세하고 예민한 혜미에게 우연은 없다. 나경은 지금의 만남이 필연인지에 대해 헤아리기 시작했다. “너는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평범한 일상을 즐기고 있었어.” 나경은 고등어와 콩나물 그리고 두부 등이 담긴 자신의 초록색 장바구니를 고요히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혜미의 헤이즐넛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오후 3시, ‘더 카페’의 오렌지 커피와 같은 그녀의 삶을 떠올리며.
약력
이란(본명: 장성희)
2000년 《시대문학》 소설 〈옥탑방〉 등단. 2023년 단편집 《사랑에 관한 6가지 단상》. 2001년 《시대문학》 신인상. 계간문예작가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