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2025년 4월 통권 309호
장성희(이란)
12월 31일에 C는 면세점 오후 근무라고 했다. A는 밤 9시 30분부터 락커룸 앞에서 C를 기다렸다. A를 발견한 C는 놀란 듯 당황했다. “제가 온다고 했잖아요.”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이고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이렇게 올 줄은 몰랐어요. 저는 내일 아침 근무라서 오늘 바로 집으로 가야 해요.”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고 대개의 사람들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어요. 당신은 시계처럼 정확하게 움직일 생각인가요?” “무엇을 하고 싶나요?” C가 포기한 듯 말했다. “이 옷을 입고 나와 일출을 보면 돼요.” C는 락커룸에서 A가 건넨 검은색 칵테일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예약된 A의 옆방 침대에 짐을 풀었다. ‘이 시간에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은 없어.’ C는 스팽글이 반짝이는 검은색 클러치백을 들고 A의 방으로 향했다. A는 하얀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수트를 입고 있었다. “저녁 식사는 했을 것 같아서 다른 것을 준비했어요.” 테이블 위에는 카나페와 연어 샐러드 그리고 샴페인이 놓여 있었다.
“크리스마스처럼 눈이 내려요.” 닫힌 창문으로 흩날리는 눈이 비쳤다. 은은한 주황색조명이 모든 것을 따스하게 감쌌다. “그 남자와 헤어져요.” A는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다. “그 말투는 아버지에게 배운 건가요?” C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정면으로 A를 마주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철이 들지 않나요? 뒤에 빚만 잔뜩 있는 미래 없는 남자와 평생을 함께 할 생각인가요?” “왜 그에게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죠?" “당신을 보고 있으면 고흐를 유일하게 지지한 테오가 생각나. 예술은 운이야. 생계와는 상관이 없어. 게다가 당신은 부자가 아니야.” “그래서 나는 그를 사랑할 자격이 없다는 건가요?” “오히려 그 반대야. 당신이 부자라 해도 그런 남자를 지지하는 건 어리석다고 생각해.” “마치 나를 경멸하는 것처럼 들려요. 똑똑하게 기억해요. 내가 지금 당신과 함께 하는 유일한 이유는 교통사고 때문이라는 것을. 그 밖에 다른 감정은 없어요." “조금도?” “네.”
“나와 결혼해.” A는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어린아이야. 당신이야말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생각인가요?” “나는 이미 튕겨져 나간 용수철이야. 당신을 만난 그날이후로.” “현실을 똑바로 봐요. 당신과 나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C는 샴페인을 잔에 따라 마셨다. 건배는 없었다. “당신과 그는 어울리나?” “우리는 아주 잘 어울려요.” “내가 보기에 그 반대인 것 같은데.” A는 카나페를 한 조각 입에 물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덮어버리려는 듯이. A는 말을 낮추고 있었다. 그녀에게 어려 보이고 싶지 않았다. C는 말을 높이고 있었다. 여기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면 그와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부탁이 있어요. 10일까지 함께 하기 한 약속은 오늘로서 끝내기로 해요. 이건 내가 생각한 결론이 아니에요.” “그에게 돌아가겠다고?” “처음부터 했던 약속이에요." “나와 함께 배신하면 안 돼? 모든 틀을 부셔버리고.”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럼 누굴 사랑하는데?” A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의 몸은 점점 돌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자정을 넘겨 둘은 함께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E를 사랑했어요. 그의 눈, 코, 입. 그의 전부를.” “미쳤군.” A의 눈빛은 금속처럼 날카롭고 차가웠다. “당신 의지와는 상관 없이 E에게 전화를 하겠어요. 지금이라도 달려와 줄 거에요. 이 옷은 돌려 드릴게요.” “필요 없어. 그런 예의 따위.” A는 샴페인을 물처럼 마셨다. “그에게 돌아가면 무엇을 할 건데?” “무엇을 한다는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죠?” “나는 당신이 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싫어.” “나는 평생 그와 함께 할 거에요.” ‘평생……’ A는 이 단어를 마치 위스키를 음미하듯 삼켰다. 알코올이 서서히 몸을 잠식하듯 단어의 의미가 그의 영혼에 깊게 퍼져 나갔다. 그를 만나고 그와 결혼을 하고 그와 식사를 하고 그와 밤을 보내고 그를 향해 웃고 그의 아이를 낳고 그와 여행을 하고 그와 친구들을 만나고 그와 쇼핑을 하고 그와 사진을 찍고 그의 슬픔을 위로하고 그와 함께 나이가 들고 그와 함께 병들다 죽음을 맞이한다. A는 자리에서 일어나 E에게 전화를 하는 C의 머리를 향해 샴페인 병을 내리쳤다.
눈이 내리는 스키장은 은색 융단을 깔아 놓은 듯 하다. 그 위를 눈이 부시도록 환한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A는 순백의 눈 위에 C를 눕혔다. 하얀색 드레스는 새해 선물이자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C는 아이보리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따뜻해 보였다. 감은 눈은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추한 것을 볼 필요도 없다. 붉은 선혈이 머리카락을 타고 옷으로 흘러 눈을 적셨다. A는 C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창백한 얼굴을 매만졌다. A는 그녀 옆에 누워서 하늘을 보았다. 새까만 하늘은 미친듯이 눈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얀 이불을 덮은 채 이렇게 차갑게 눈 속에서 C와 함께 사라질 듯 했다. A는 눈을 돌려 C를 바라보았다. 검붉은 피가 눈물처럼 C의 빰을 타고 흘렀다. C는 마치 눈 위에 박제된 인형 같았다. 의지가 없는 인형은 소유자의 것이 된다. 영원히. 뜨거운 눈물이 A의 뺨을 타고 흘렀다.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E는 개인전을 했다. ‘Crazy’ 페라리의 섀시가 노출된 작품 앞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다소 거칠게 부서져 내린 듯한 구조 주변에는 자잘한 부속들이 흩어져 있었다. 빨간색 차체는 발에 밟힌 깡통처럼 구겨져 벽에 기대어 있었다. “이 작품 제작비가 얼마야?” “저렇게 부순 걸 누가 사가?” 속삭이는 사람들 속에서 E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투자금을 받아 중고차를 구입해서 마음대로 부순 후에, 개인이 아닌 기관에 팔았기 때문이다. 부서진 차체, 엔진, 서스펜션, 브레이크, 조향장치, 변속기, 클러치, 핸들, 차축, 차바퀴. 상당한 무게의 돌이 일정한 각도로 떨어져 부서진 페라리의 형태를 시뮬레이션으로 살펴 본 후, 부속 하나하나를 그에 맞춰 재구현했다. 현실이 작품이 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이다. 작가가 그 작품을 창작했기 때문이다. E는 지난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그때 C를 A에게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오후 근무를 마치고 오전 근무를 해야 하니 집에서 쉬겠다고 했어도 한 해의 마지막을 혼자 맞이하게 두지 말았어야 했다. 홧김에 레스토랑 예약을 취소하지 말았어야 했다. 억지로라도 그날 일을 쉬게 하고 함께 했어야 했다. 하지 못한 모든 일들이 무거운 돌덩이가 되어 가슴을 짓누른다.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를 해.” 아버지는 면회실 안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A를 응시했다. “아버지, 사람을 죽였어요.” “너는 지금 아픈 거야.” “나는 나쁜 사람이에요.” “플라톤의 <국가>를 기억하니? 제7권에 변증법이 나와.” “지금 정반합(正反合)을 이야기하시나요?” “네가 알고 있는 원칙과 전혀 상반된 것에 닿았다고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야. 사랑은 완벽한 인생에 오류야.” “완벽한 인생이 존재하기는 하는가요?” “나는 너를 늘 바른 곳으로 인도했어. 그런데 너는 오류에 빠진 거야. 그래서 고장이 났지.” “그래서 저를 복구하실 생각이신가요?” “아픈 게 나으면 넌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그것이 아버지가 이해하시는 변증법인가요?” “아버지, 사랑은 오류가 아니에요. 완벽한 하나에요. 내면적 결핍이 채워지는.” “고독은 인간이 평생 갖고 가는 자아의 일부야. 치료를 필요로 하는 병이 아니란다. 네가 완벽하다 느끼는 그 감정이 너를 추락시킨거야. 아직 모르겠니? 너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하얀 방에 A는 혼자 있었다. 창문을 통해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C가 눈을 감은 해, 눈이 내리지 않는 크리스마스였다. 책상 위에는 노트와 서류 뭉치가 놓여 있었다. ‘데칼코마니.’ A는 C의 작품을 출력해서 갖고 있었다. 그 작품은 미완성이었다. ‘한 끝이 다른 끝에 닿아 완전히 하나의 작품이 되는 데칼코마니. 완벽한 대칭은 예술에서 우연성을 제거한 재미없고 싱거운 작품이 될 확률이 높다. 나에 대한 복제가 나의 일체를 이루는 일부가 되는 것은 식상한 과정이다. 좀 더 특별한 무언가가 되려면 자신을 부수는 행위가 필요하다. 스스로를 뛰어 넘지 못한 채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만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이유로 데칼코마니의 예술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것은 반복과 재생산의 연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그를 만났을 때 나는 나의 복제를 만나는 듯 했다. 그와 함께 할 때 내 삶은 데칼코마니를 이루었다.’ A는 C의 소설의 도입부를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자신의 노트에 그 다음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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