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신부 (2)

-『한국소설』 2025년 4월 통권 309호

by 이란

장성희(이란)


까만 밤.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의 장막이 바다를 휘감고 있어, 그 존재는 오직 소리로서 증명된다. 12월 26일 새벽, A는 와인을 마시며 보이지 않는 바다를 듣는다. 열린 창문으로 바닷바람이 밀려들고 커튼 자락은 부드럽게 흔들린다. A는 의자에 앉아 커튼을 매만진다. 매끄러운 촉감이 손끝에 닿는다. 혼자 있는 것은 익숙하다. 여행을 위해 준비한 캐리어 안에는 그가 좋아하는 책과 음악으로 가득하다. 차가운 공기가 머무는 파리의 겨울, 어느 한적한 공간 속에서 그것들과 벗하며 따뜻한 시간을 보내려 했다. 하지만 더는 그 벗들이 그립지 않았다. A는 C를 떠올렸다. 단정한 검은색 원피스와 대비되는 원색의 이국적인 스카프가 베이지색 숄더백에 매어져 있었다. 그 가방 안에 담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그녀는 단단한 껍질 안에 무언가를 숨겨두고 있었다. 와인은 여러 가지 맛과 향이 뒤섞여 있다. 살갗을 에는 겨울 바람이 A의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서게 한다. 동시에 몸 안에 퍼진 알코올은 그의 온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는 하얀색 시트로 감싼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롤러코스터는 서서히 고점을 향해 움직인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소실점은 점점 더 먼 곳으로 이동하고 낙하에 대한 공포가 조금씩 밀려든다. 고점에 이르러 숨을 고르면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듯 하강한다. 풍경은 퍼즐처럼 뒤섞여 현실은 몽롱하게 사라진다. 심장이 멎을 듯한 강렬한 스릴이 전신을 휘감는다. 강하게 그리고 또 약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롤러코스터는 움직인다. 긴장을 풀어 놓은 채 주변을 둘러 보면 사물은 산만하게 흩어져 곧 뒤엉키기 시작한다. 그렇게 모든 것이 아득해질 무렵, 놀이 동산에서의 짧은 여행은 끝이 난다. C는 담배를 피우는 E의 등을 부드럽게 끌어 안았다. 말보루 레드. 그와 사귄지 3년이 되었지만, C는 담배 냄새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얀 담배 연기가 방 안을 채우자 C는 이불로 몸을 감싼 채 창문을 열었다. “춥지 않아?” E가 물었다. “담배 냄새보다는 나아.” “그 말은 꼭 내가 싫다는 말처럼 들려.” “아니. 전혀.” C는 E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담배 연기를 나누어 가졌다.



침대 위에 누운 E의 등 위로 용이 새겨져 있었다. C는 그의 타투를 천천히 손으로 따라 그렸다. “아름다워.” 처음 그를 만났을 때 C는 E의 타투를 알지 못했다.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던 그는 다소 거칠어 보였지만 솔직하고 진실하게 느껴졌다. C는 E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맑은 갈색 눈동자 그리고 긴 속눈썹이 마음에 들었다. E의 타투를 따라 그가 처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너바나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한 거야. 성공을 바란 것이 아니야. 그런데 ‘네버 마인드’는 엄청나게 히트했거든. 순수한 커트 코베인은 그 성공 속에서 방황한 거야. 상업적 성공은 세상에 대해 경멸을 쏟아내던 아티스트에게 치명적인 독약과 같거든. 자기 붕괴야.” E는 커트 코베인의 자살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예술가의 음악성은 현실에 대한 치열함에 뿌리내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뿌리가 사라진 채, 성공의 열매를 손에 쥔 예술가는 길을 잃은 어린아이와 같다. 순수한 동시에 위험하다. C는 손끝이 용의 꼬리 끝에 닿았을 때, 그의 등에 키스했다.



오전 근무를 마친 C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E는 보름 전에 선유도의 한 펜션을 예약했다. 그리고 25일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에 그녀를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눈길이 미끄러워 늦는 줄 알았다. 문자도 전화도 그녀에게 닿지 않자 E는 차 밖으로 나와 면세점으로 향했다. 이미 퇴근하였다는 대답만을 들었다. E는 사고라는 생각에 불안에 휩싸였다. 핸드폰에는 20여통의 전화 기록이 남아 있었다. C는 눈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녹으면서 지저분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름날, 비가 온 뒤에는 녹음이 짙어지지만 겨울날, 눈이 내린 후의 세상은 서서히 진흙탕으로 변하는 것 같아 싫다고 했다. “그냥 하얗게 눈이 내리는 순간을 즐겨.” E는 가벼운 마음으로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은 것이 좋아. 변하는 것이 싫어.” C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 E가 C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데 눈이 내리는 어느 크리스마스에 C가 증발해버린 것이다.



병원에 있다는 C의 전화를 받았을 때, E의 감정은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런데 C는 오히려 크게 다친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다 곧 검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전화를 끊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에 저녁 식사 중이라고 문자를 했다. 본인 잘못인데 상대방에게 폐를 끼친 것 같다며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E는 그런 C를 알고 있었다. 미안해서 거절을 못하는 C는 그런 여자였다. 바에서 딸기크림 츄파춥스를 입에 문 채 핑크색 코스모폴리탄을 마시는 C를 만났다. 전시회에서 한 점의 작품도 팔지 못한 E는 위스키를 마시다 C를 만났고, 커트 코베인에 대해 이야기 하다 그녀의 칵테일까지 결제했다. 그녀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모텔에서 결제를 한 후, 아침을 맞이했을 때 그녀는 연락처를 묻는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C는 친절한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호의적이다. 그것이 위험하다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 남자 유부남이야?’ E는 문자로 C에게 물었다. ‘아니. 의대 예과 1학년, 학생이야.’



해수면 위로 작은 섬들이 겹쳐 보이는 안면도는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식당 문 밖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된장찌개를 먹는 E의 건너편에서 C는 크린베리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를 먹고 있었다. 눈은 더는 내리지 않았다. “너는 참 유난스러워.” E는 화장기 없는 C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상관 없어. 아침에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사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C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마시며 E를 바라보았다. E는 국과 찌개 그리고 반찬이 있는 식사를 좋아했다. 특히, 아침은 더욱 그랬다. 빵이나 과자 그리고 초콜렛이나 사탕류를 안 먹는 대신 세 끼 식사는 규칙적으로 했다. 일하는 어머니는 E에게 제때 식사를 차려주지 못했다. 그래서 햄버거나 컵라면으로 허기를 채운 적이 많았다. E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 라면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신물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나는 요리를 못해.” 처음 만난 다음날 아침에, 해맑게 웃으며 C가 말했을 때, E는 ‘아차’하는 생각이 밀려 들었다.



A는 호텔 조식과 상관 없이 과일 샐러드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술기운에 아무렇게나 닫은 창은 커튼 틈으로 햇살을 쏟아내고 있었다. 창을 열자 눈 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바나나, 자몽, 토마토, 포도, 그리고 딸기 등이 새하얀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요거트 드레싱은 그대로 둔 채 A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차가운 겨울 바람, 깊고 푸른 동해 바다, 그리고 몸 안에 퍼지는 뜨거운 액체의 흐름이 맞물려 극단적인 조합의 아침을 그려내고 있었다. 카페인은 남은 피로를 밀어내려는 듯 그를 각성시켰다. A는 부드러운 바나나와 살짝은 떫은 자몽 조각을 차례로 입에 넣었다. 드레싱은 필요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했어요?’ A는 C에게 문자를 보냈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고 있어요.’ C의 답장이 도착했다. ‘덕분에 파리가 아닌 부산에서 휴가를 보내게 되었어요.’ ‘미안해요.’ ‘1월 10일까지 휴가였는데. 나에게 시간을 줘요.’ ‘남자친구와 함께 있어요.’ ‘올해 마지막을 나와 보내고 새해를 맞이해요. 그리고 11일이 되면 당신을 남자친구에게 되돌려 줄게요.’



C는 거짓말을 싫어한다. 밥을 절반 정도 먹은 상태에서 식사를 마친 E와 해변을 산책하는 내내 C는 A의 제의에 대해 생각했다. 귀찮고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E는 어제와 같은 옷에 검은색 패딩을 입고 있었다. C는 아이스블루 진과 화이트 티셔츠에 핑크색 점퍼를 입은 채 그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오빠, 나를 믿지?” “내가 늘 말하지만 사람은 변해.” “오빠는 너무 냉소적이야.” “너는 이런 나를 좋아하잖아?” “그건 그래.” “만약 내년 1월 10일까지 내가 다른 남자와 시간을 보낸다면 어떨 것 같아?” “누구랑? 너희 아버지?” E는 싸늘하게 웃으며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그 어린 남자는 아니겠지?” C는 답을 하지 못했다. “너 자꾸 그 어린애한테 끌려 다닌다. 그 수작을 받아주겠다는 거야? 어려도 남자야. 쉽게 생각하지마.” “나 때문에 여행도 못 가고, 부모님은 해외에 계셔. 나는 오빠를 사랑해. 변하지 않아.” “네가 문제가 아니라 그 어린애가 문제야. 너 그렇게 끌려 다니다 결혼까지 하겠다. 다 필요 없고, 네가 무슨 스페어 타이어야? 그 애의 빈 시간을 왜 채워야 하는데?”



그대로 펜션을 빠져나온 C는 그후 E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연애 3년차 한 해의 마지막에 E는 청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본인이 원하는 만큼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더 끌고 싶지 않았다. C의 20대 마지막을 E의 고백으로 마무리 하게 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방 안 테이블 위에 놓인 파란색의 작은 상자를 열어 반지를 꺼냈다.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너무나 흔하지만 누구나 받고 싶은 고백을 선물하고 싶었다. E는 레스토랑에 전화해 12월 마지막 날의 저녁 예약을 취소했다.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C의 성격은 그에게 귀엽게 느껴졌지만 이번만큼은 참기 어려웠다. 상대방의 의도가 어떤 지 헤아려서 거절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E는 생각했다. 왜 자신이 C의 삶에서 그 남자와 같은 무게로 서 있어야 하는 지 용납하기 어려웠다. 만약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면서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라면 더 용인할 수 없었다. E는 C에게 받지 않는 전화를 걸다 핸드폰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너무 멀어지면 외로워요.” A는 C를 위해 같은 호텔, 자신의 옆방을 결제하였다. 그렇게 A는 C와 부산에서 주말을 함께 보냈다. 아침은 C의 방에서 함께 했다. A는 과일 샐러드와 아메리카노를 C는 베이글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전망 좋은 방에서는 산책이 필요치 않다. 필요한 모든 것을 방 안에서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C는 회색빛 겨울 하늘과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잔잔하게 일렁이는 해수면을 바라보았다. 햇빛은 구름 사이로 쏟아져 내려 바다는 마치 바람을 따라 사부작거리는 펼쳐 놓은 비단 같았다. “아름다워요.” C는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침 식사하고 무엇을 할 생각인가요?” A는 풍경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삶의 배경일 뿐이었다. “노트북을 가져왔어요. 글을 쓸 생각이에요.” “잠시 산책은 어때요? 여기서 보는 것과 직접 해안선을 따라 걷는 것은 달라요.” “그럴까요?” C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A는 베이지색 코트 안에 백색의 후아유 후드집업을 입고 있었다. C는 하얀색 원피스에 아이보리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당신은 스스로가 누구라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만든 물건.” “하나님을 이야기 하나요?” “아니요. 우리 아버지를 이야기 하는 거에요.” “완벽주의자이신가봐요.” “아마도.” “완벽주의자는 계획이 어긋나는 것을 싫어해요. 그런데 당신이 지금 프랑스가 아닌 부산에 있으니 당신 아버지는 화가 나셨겠어요?” “아직은 모를 거에요. 카드 사용 내역을 알기 전까지는.” “지금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면 더 큰 일이 일어날 거에요.” “상관 없어요.” “당신은 아버지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군요.” “용수철처럼 너무 끌어당기면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힘도 커져요. 지금 내 모습은 나의 자아와 상관이 없어요." “그럼 당신의 자아는 무엇인가요?” “돌아가서 소설을 쓰고 점심 식사는 무엇으로 할까요? 스시 어때요?” A는 답을 하는 대신에 질문을 했다. “상관 없어요.” “당신, 나에게 그 표현을 배웠군요. 그럴수록 타의에 의해 자아와는 상관 없는 선택을 하게 돼요. 조심해요.” “상관 없어요.” C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소설 제목은 뭐에요?” “데칼코마니.” “중심선을 경계로 양쪽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는 그림을 말하는 거죠?” “예.” “그런 작품을 좋아해요?” “아니요.” “그런데 왜 써요?” “소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만을 다룰 필요는 없잖아요?” 말을 마친 C는 연어 초밥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열어 E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오빠의 작품을 보면요, 힘이 느껴져요.” “제가 느끼기에는 파괴 본능이 담긴 작품인데요.” A는 C의 핸드폰에 담긴 E의 작품 사진들을 천천히 살펴 보았다. 자동차의 섀시만을 드러낸 작품. 텔레비전을 조립하기 전의 상태로 전시하거나 냉장고의 외피를 뜯어내어 내부 구조가 그대로 보이는 작품 등이었다. “독특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완성된 상태만을 보는데 그 안을 들여다 본다는 관점이.” “마치 사람을 해부한 상태로 전시한 느낌인데요.” 말을 마친 A는 광어 초밥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E의 작품에 대해 반짝이는 눈으로 말하는 C를 응시했다. A는 C가 E에게서 영감을 얻고 있다고 확신했다. ‘취하고 싶다.’ A는 사케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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