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랑 Oct 16. 2019

지킬 앤 하이드와 같아서..

한 지붕 두 가족 - 조카의 소풍

지난 일요일 언니가 부탁을 했다. 

"화요일에 둘째가 소풍을 가는데 4시에 P마트에서 내린대"

"그래서?"

당연히 마중을 부탁하는 줄 알면서도 퉁명스럽게 물었고, 이에 언니는 조심스레 마중을 부탁했다.

"응"

이라고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시 후 언니에게 카톡이 왔다.

"맥주 한 잔 하게 내려와~"

불편한 마음에 보고도 못 본 척을 하고 멍하려던 찰나에 형부에게 전화가 왔다.

"처제~ 뭐해~ 내려와~~ 맥주 한 잔 하자!"

형부의 전화에 어쩔 수 없이 옷을 고쳐 입고 내려갔다.


어색했다. 

소풍 마중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나누지 않고 형부와 언니가 꺼낸 이런저런 이야기들과 함께 맥주잔을 비웠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있는 맥주를 다 비우는 것이 당연한데 어느 정도 먹다 그만 먹겠다고 자리를 일어났다. 


어제 나는 글쓰기 수업에 갔다가 동네로 향했다. 2시. 집에 올라갔다가 4시에 맞춰 내려오기엔 집에서 뭔가 하려고 폼 잡다가 끝날 것 같은 시간이었다. 동네 분식집에서 점심을 때우고 조카가 내리기로 한 곳과 가장 가까운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초등학교 앞에 위치해 학생들의 하교를 기다리는 엄마들이 무척 많아 소음이 상당한 장소. 글을 쓰기에 적합하지는 않았으나 이동 거리를 줄이기 위해서는 최선의 장소였다. 


시간에 맞춰 나갔는데 이상했다. 유치원 차량이 내릴 곳이라면 다른 엄마들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언니가 잘못 말할 리가 없으니 조금 더 기다려보다가 8분이 지나 안 되겠다 싶어 언니에게 카톡을 했다.

"차가 막히나? 아직도 안 오네? P마트 맞지?"

"아니 언제 P마트랬어. T마트랬지"

어제 아침 언니는 전에 알려준 장소와 다른 마트로 가라고 알려주었다. 변경되었나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아마 평소 같았음 바뀌었냐고 물었을 나인데. 바로 카페로 뛰어 들어가 노트북과 가방을 챙겨 T마트로 달렸다. 한참을 달리는데 조카와 같은 유치원 가방을 든 아이가 엄마와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혼자서 길에 서 있을까 걱정이 되어 달리는데 옆 놀이터에 조카 또래 아이들이 거의 한 20명은 뛰어놀고 있었다.(진짜로) 지켜보는 엄마들과 함께.


유치원 앞에 세워진 차를 보고 유치원으로 뛰쳐 들어갔다. 조카가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게도 활짝 웃으며 나왔다. 유치원에서 피아노 차를 기다려야 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찾아와 반가웠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반가웠다고는 안 했다. 그런 뉘앙스였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속상했다. 유치원 차에서 내리면 짠하고 나타나고 싶었는데. 엄마 손을 잡고 가는 친구들처럼 맞이해주고 싶었는데. 미안한 맘에 이모가 장소를 착각해서 여기로 뛰어왔다고 변명을 늘어놓으며 학원에 데려다주었다.


그리고는 혼자서 치솟는 짜증을 참았다.




오랜만에 굽이 있는 워커를 신고 만보를 훌쩍 넘게 걷고 뛰었다. 지난 몇 주간 새벽 3 ~ 4시에 잠이 들곤 했는데, 어제는 12시에 잘 수 있었다. 


오전에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형부와 어렵게 연차를 맞춰 놀이공원에 가려했었는데 그다음 날 조카의 학예회가 생겼다. 놀이공원을 포기하는 것은 당연하고 연차를 하루 미루는 것도 쉽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썼던 연차를 미루면 당일 연차로 간주되어 불이익이 있는데 학교 공지가 늦게 나온 사정이 인정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브런치에서 아래의 글을 공감하며 읽던 중이었다. 아이 엄마로 직장에서 일하는 것에 관한 애환을 담은 글이었다. 


https://brunch.co.kr/@sypova/128


언니에게 미안했다. 마중 한 번 나가면 되는 것으로 유세를 떤 것 같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모르는 브런치 속 사람에게 격하게 공감하면서 어제 내가 한 행동과 마음이 참 얄팍하고 위선적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이 글을 전달하며 사과했다. 

"별 것도 아닌 걸로 너무 유세 떨어서 미안해"


나는 내가 마음을 나쁘게 썼다는 것을 깨달으면 투명하게 잘 인정한다. 그리고 금방 잘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리고 또다시 그런 일을 벌이는 실수를 반복한다. 


내 맘 속에 지킬과 하이드가 공존해 나는 오늘도 깨닫고 인정하고 사과했다. 부디 내가 실수까지 완벽히 코스를 밟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따끈한 반성을 글로 담아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빠의 선전포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