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잊지 못할 가족여행

by ri

밖을 나서면 숨이 턱 막히는, 타는 듯한 더위가 절절 끓는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이제 가족, 연인, 친구들 삼삼오오 모여 피서 겸 여행을 갈 휴가철이다. 부끄럽지만 성인이 되고 복학과 휴학을 반복하다가 결국 대학을 그만두면서 오랜 시간 자리를 잡지 못하다 보니 평범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여름휴가였다.


나의 경제적 불안정성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은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로 한 번도 함께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또 아빠가 계셨을 때도 초등학교 때까지 정도만 여행다운 여행을 갔었고 그 이후에는 명절에 시골 가는 것 말고는 가족이 함께 집을 나선 일이 없었다.


새해가 시작되거나 연말을 마무리하면서 하고 싶은 목록에 늘 빼지 않고 써넣었던 가족 여행이었다. 각자 사는 게 바쁘기도 했고 나 역시 가족들에게 마음만 있을 뿐 실상 표현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는데 특히나 가족 여행은 꽤나 가족 간에 사이가 좋아야 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막연하게 바라왔다.


그러다 서른에 나는 다시 대학에 들어가 졸업하면서 이전보다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스무 살 때부터 직장생활을 했던 또래에 비하면 한참이나 뒤쳐졌지만 중고신입을 거쳐 2년 차 직장인인 나는 이제 통장에 많진 않지만 나름 뿌듯한 잔액도, 시간적 여유도 갖추게 되었다.


드디어 이번 여름, 시간으로 치면 24년 만에 우리 가족은 함께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우리 가족은 대화가 많거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가족은 아니다. 말을 걸지 않으면 절대 먼저 말을 안 하는 남동생부터 맥락이나 눈치는 살피지 않고 일방통행 화법의 엄마, 무뚝뚝하면서도 가끔 욱하면 목소리를 높이는 나까지. 서로에게 큰 잘못을 하거나 화해를 해야 할 정도로 갈등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각자의 성격만 봐도 만만치 않은 조합이란 걸 알 수 있다.


거기다 우리 가족은 함께 외식도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나마 작년부터 엄마의 환갑을 기념해 괜찮은 식당에서 외식을 했던 걸 시작으로 명분이 생길 때마다 가족들과 맛집을 갔던 덕인지 엄마와 동생은 가족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직까지 동생이 가족끼리 뭔가를 할 때 가장 귀찮아하는데 가족 중에 유일하게 차를 소유하고 있어 네가 없으면 우리는 움직일 수 없다고 엄마랑 멀리까지 버스를 타고 어떻게 가냐며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산으로 향했다. 내가 아팠을 때 동생이 드라이브로 데려갔던 곳이었다. 그게 벌써 2년 전인데 그때 깜깜했던 밤바다, 우거진 소나무, 정겨운 웃음소리, 고기 굽는 냄새가 나던 캠핑장을 보면서 나도 건강해지면 돈을 벌어서 가족들과 나중에 꼭 와야지 하고 속으로 다짐했었다.


기억을 더듬어 2년 전 캠핑장에 있던 숙소를 찾는데 생각보다 비쌌지만 뷰도 좋고 깔끔해 큰 맘먹고 예약을 했다. 가는 길은 그때보다 거의 반 이상 멀게 느껴졌다. 그토록 바라던 가족여행이라 기분이 좋은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셋이 가는 첫 여행이라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실감이 안 났다.


늦은 장마로 충남에 비가 많이 오던 때였다.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캠핑장에 도착하니 이제 막 휴가철이 시작되어서 그런지 한산했는데 숙소도 기대한 대로 좋았고 비도 안 와서 바다에 발도 담글 수 있었다. 저녁엔 고기를 굽고 된장찌개를 끓였다. 동생이 마침 불멍세트를 사와 장작에 불을 붙여서 캠핑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나는 고기가 맛있는 지도 잘 느끼지 못하면서 밥을 먹고 있던 참이었다.


“참 괜찮다.” 목소리를 따라 맞은편에 앉은 엄마를 봤다. 엄마는 풍경에 눈을 못 떼고는 몇 번이고 “참 괜찮다.” 하는 것이었다. 살면서 엄마가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순간 그때까지만 해도 내 욕심으로 가족들을 멀리 데려와 고생시키는 건가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마음이 한순간에 기쁨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특별한 걸 하지 않아도 특별할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날 깨달았다.


운까지 따라줘서 밤에 폭죽놀이를 할 때까지도 비는 오지 않았고 씻을 때가 되어서야 기다렸다는 듯이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엔 또 비가 그쳐서 집에 갈 때까지도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 가족 여행은 내가 지금까지 가본 여행 중에 가장 좋았던 여행이 되었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11화당신에게 음악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