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신에게 음악이란?

by ri

나의 가장 오랜 기억 속에 음악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은하철도 999>의 주제곡이고 다른 하나는 패닉의 달팽이라는 곡이다.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나도 tv 만화를 굉장히 좋아했었다. <은하철도 999>는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만화는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 유일하게 노래방에서 신나게 불렀던 장면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곡이다.


패닉의 달팽이는 당시 인기가 상당했던 곡으로 내가 가사를 모두 외운 첫 번째 가요였다. 7살 아이가 좋아할 취향인가 싶지만 그땐 철학적인 가사나 독특한 보컬에 끌렸다기보다는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음악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가요에 입문하게 되었고 박미경, 김건모, 클론, H.O.T., 젝스키스, S.E.S, 핑클, god 등등 시대별로 쏟아져 나왔던 재능 많고 멋있는 가수들의 히트곡들은 나의 여가시간을 즐겁게 해 주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케이블과 인터넷의 대중화로 해외음악을 쉽게 접하게 되었다. QUEEN, 린킨파크, 브리트니 스피어스, 에미넴, X-JAPAN, 아라시 같이 락, 힙합, 팝, 아이돌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경험했다. 사람이 평생 듣는 음악은 중학생 때까지 듣던 음악이라는 말이 자주 인용되곤 하는데 삼십 대 이후로는 듣는 음악 중에 그렇게 좋아하던 락이 빠진 걸 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인 것도 같다.


그리고 클래식을 빼놓을 수 없다. 어린 시절 클래식이라고 하면 가기 싫은 피아노 학원에서 들리던 음악이었다. 지루하고 졸리는, 그러다 어쩐지 슬프기도 하고 심하면 무섭기까지도 했다. 왜인가 하니 피아노 연주곡이 무서운 영상에 배경음악으로 쓰이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비슷한 예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토요미스터리극장>에서 동요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이후로 한동안 음악과 영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괴로워했던 때가 있었다) 십 대가 되고 클래식이 더 이상 무섭게 들리지 않게 되고는 운명의 장난처럼 또 다른 부정적인 접점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모의고사를 치를 때 잠깐 나오는 음악으로 클래식이 쓰인 것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통화 대기음으로, 요즘은 사라졌지만 대형 차의 후진음으로 쓰인 클래식은 우리의 일상생활 곳곳에서 접할 수 있는, 제목과 작곡가만 모를 뿐이지 심지어 멜로디도 몇 가지는 외우고 있을 정도로 생각보다 가까운 음악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클래식을 떠올리면 고전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턱시도 같은 정장을 차려입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귀족들이 모여 진지하게 음악을 감상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이래서 편견이 무섭다고 하는 모양이다.


반대로 클래식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줬던 기억들도 있었다. 그간 나를 지나간 어른들 중에 클래식을 좋아하는 몇몇 분들을 뵌 적이 있었던 것이다. 늘 클래식이 나오고 있던 어떤 교수님의 연구실부터 전혀 클래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상사분과 함께 차를 탔다가 듣게 된, 끝날 줄 모르던 클래식 플레이리스트까지. 내게는 지루하고 따분한 데다 무슨 유럽 귀족들이 잘난 체하며 들을 것만 같은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도 모르게 클래식을 찾아 듣는 나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설마 나이 탓인가?) 딱히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거나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클래식이 주는 안정감, 우아함, 정제된 느낌, 그러면서도 희로애락이 담긴, 그렇듯 순수하게 음악적인 끌림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돌아가신 아빠가 내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어 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빠에게 클래식이란 아름다운 음악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살아생전 클래식은커녕 우리가 함께 들은 음악이라고는 명절이나 가족 여행을 갈 때 들었던 히트곡 모음집 테이프가 전부였지만 말이다. 도착지에 다다랐을 때쯤 나는 대부분의 곡을 따라 부를 수 있게 될 만큼 가사를 외운 상태였는데 돌이켜 보면 함께 음악을 듣던 그 순간을 어린 나는 꽤나 즐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사업을 하던 아빠는 머리가 복잡했을지도 모르지만 내 기억 속에 우리는 그 순간 말없이 같은 음악에 집중하는 친한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음악이 내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걸, 또 셀 수도 없이 많았던, 때로는 맵고, 때로는 짜고, 때로는 달고, 때로는 쓰기도 했던 지나온 인생의 단편마다 음악이 함께 했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어떤 역경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언제든 손 뻗으면 닿는 곳에 나를 위로해 줄 음악이 있다는 걸 상기하면서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용기를 내볼 수 있을 것도 같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10화엄마와 친해지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