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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문장과 마음을 읽는 순간

by ri

지난주 금요일, 필사 모임에 참여했다. 모임은 우연히 인스타 알고리즘에 얻어걸린 광고에서 알게 되었다. 마침 시간도 있었고 자취집에서 가까운 북카페에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계정을 살펴보니 서울 곳곳에서 여러 번 필사모임을 가졌던 모양이었다. 뭔가 거창하진 않았지만 모임장이 필사 모임을 시작하게 된 히스토리를 설명한 글을 보니 영 알맹이가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따로 정해진 책도 없었고 노트 한 권만 준비하면 되어서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신청을 하려고 하니 바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부지런한 알고리즘 덕분에 같은 광고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은 꼭 결심을 해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되새기면서 신청서를 작성했다.


필사는 작가지망생들이 많이 한다고 들었고 나 역시 작가지망생이긴 하나 글을 잘 쓰고자 하는 마음으로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올해 3월부터 막연하게 해보고 싶었던 성경 필사를 시작해 지금까지 하루에 15분 정도씩 6개월째 쓰고 있다. 쓰기 전에는 게으름을 피우면서 조금씩 미루다 가도 다른 할 일들을 모두 마치고 개운하게 씻고 나오면 다행히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책상에 앉게 되었다. 성경 필사는 어느새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만의 의식이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래, 한 번 해보자.’ 스스로의 의지를 다지는 시간이기도 하고, 매일 조금씩 책끈을 뒤로 넘기면서 뿌듯한 마음이 쌓이는 시간이었다.


15분가량의 필사하는 시간 동안 성경 속 글귀에 집중하다가 샛길로 빠져 그날 있었던 일들을 되짚게 되거나 갑자기 잊고 있던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처음엔 되도록이면 필사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뭔가 제한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하고자 하는 의지가 꺾이면서 노동에 가깝게 느껴져 지금은 무슨 생각이든 부정적인 류의 생각이 아니라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하고 있다. 거기다 아무 소음도 없는 조용한 상태에서 쓰는 것보다는 잔잔하게 음악을 들으면서 쓰는 게 더 좋을 거 같아 초기에는 클래식을 들으면서 쓰다가 요즘은 라디오를 틀어 놓는다. 눈으로 집중해서 문장을 따라가다가 다음 문장이 시작되기 전 잠깐의 사이에 꽤나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웃음소리, 음악소리, 말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가 다시 문장으로 돌아오는 식이다.


그러다 여럿이 함께 필사를 한다는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필사를 한다라… 아마 내게 필사 경험이 없었다면 선뜻해야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필사라는 활동이 가지는 장점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필사는 어떨지, 말하자면 필사의 확장에까지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이다. 문장을 따라 쓰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생각들을 공유하고 그 안에서 알아채지 못했던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도, 나아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알아가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도 모르는 사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필사 모임은 내가 사는 동네에서 이루어졌다. 집에서 빠른 걸음으로 5분 정도면 도착할 만한 위치에 어느 북카페에서였다. 우리 동네에 이런 분위기 좋은 북카페가 있었다니 놀라면서도 그간 모르고 살았던 세월이 괜히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로 내 취향의 카페였다. 시작 시간이었던 8시가 되자 모두 한 테이블에 모여 각자의 이름이 적힌 자리에 앉았다. 모임엔 나와 모임장을 포함해 6명이 있었다. 인사를 나눈 뒤에 북카페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주문할 수 있는 음료를 먼저 알려주셨다. 모임원들은 카페 내부에 원하는 자리를 고르고 자유롭게 독서와 필사를 한 뒤 9시에 다시 자리로 돌아오면 되었다.


감성 있는, 느낌 좋은 자리는 이미 일찍 온 사람들에 의해 선점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일 예쁘고 멋지진 않지만 독서와 필사를 하기 불편하지 않은 기본 4인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널찍한 자리를 골랐다. 그런 다음 카페를 둘러보며 눈길이 머무는 소품을 사진에 담거나 곳곳에 북카페 주인의 손글씨인 듯한 책의 구절들을 써놓은 메모를 유심히 읽기도 하고, 진열된 책과 책장에 꽂힌 책들도 여러 권 펼쳐보았다. 좋아하는 박완서 작가님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에는 양귀자 작가님의 책들이 있었다. 읽어보고 싶기도 하고 필사로 남기고 싶을 만한 좋은 문장도 많겠지만 그날은 어쩐지 끌리지 않았다.


그러다 내 자리 뒤편에 있던 책장에 그림책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 권의 책을 모두 다 읽기에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생각할 여유를 줄 수 있는 그림책이 적절할 것 같았다. 그때 북카페 사장님께서 좋아하는 책들이라고 하시면서 그림책 몇 권을 건네주셨다. 그중 한 권은 이미 읽은 책이었고 나머지 중에 표지와 그림체가 마음에 드는 책을 펼쳤다. 그렇게 돌고 돌아 마스다 미리의 <주말엔 숲으로>라는 그림책을 만나게 되었다.


책은 귀촌한 30대 주인공이 농촌마을에서 소소한 일상을 보내며 이웃들과 어울리고 주말이면 도시에 사는 두 명의 절친이 놀러 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내용이었다. 특히 직장인인 두 친구가 전하는 에피소드들이 재밌는데 함께 숲이며 호수를 다니면서 벌어지는 일들에 주인공이 해답처럼 툭툭 내뱉는 말들이 쿵- 마음에 박히는 울림이 있었다. 나는 다행히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었고, 필사한 문장은 5 문장이었다.


“어두운 곳에서는 바로 발밑보다 조금 더 멀리 보면서 가야 해.”

“손 끝만 보지 말고 가고 싶은 곳을 보면서 저으면, 그곳에 다가갈 수 있어.”

“상상력이 없다면 인간다움이 없는 게 아닐까.”

“오늘 이 시간도 언젠가 그리워질 거야.”

“똑바로 나갈 것인지, 작게 회전하면서 빠져나갈 것인지, 상황에 맞는 것을 선택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일상에도, 직장에서도, 삶에도 적용될 만한 말들이었다. 단순히 문장이 좋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이어서 더 와닿았던 문장이었다. 성경 필사를 할 때는 내용의 흐름을 이해하려고 했다면 이렇게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 필사를 해보니 나조차 몰랐던 나의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어 다시 모인 모임원들은 각자 작성한 표에 따라 질문하면서 필사한 문장을 나누었다. 대화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의 전공분야와 직업도 얼추 알게 되고 서로에게 묻고 싶었던 것들, 무슨 기준으로 책을 고르는지 같은 사소하면서 재밌는 화제로도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고는 어느새 종료 시간인 10시가 넘어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렇게 짧은 경험으로 나와 더불어 다른 이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시도들이 쌓여서 어제보다는 나은, 어제보다는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있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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