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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약을 앞두고서

by ri

2023년 4월 나는 폐쇄병동에 한 달간 입원을 했었다. 그렇게 약물치료가 시작되고 퇴원 후에도 담당 선생님은 진료 때마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약을 복용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매일, 그것도 기약이 언제까지인지도 모르는 채로 약을 먹어야 했다. 뭐랄까 그것은 일종의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평소에는 너무나 사소해서 누리는지도 모르고 누렸던 건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약 없는’ 일상을 하루아침에 빼앗긴 것이다. 약을 매일 잊지 않고 먹는 것 자체로도 상당한 주의가 필요한 일인데 그 정도의 귀찮음 정도는 소소한 일상의 상실감에는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초반엔 부작용도 심했어서 불편한 점을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조금씩 약을 바꾸면서 달라지는 상태를 살펴야 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엔 그 부작용이라는 게 꼭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었을 때처럼 이질감이 심한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주 불편한 부분을 얘기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선생님이 어느 정도 적절한 선에서 종류와 용량을 조절해서 최적화를 하겠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 예민하다 보니 치료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고 걱정을 내비칠 정도였다.


그나마 시간이 흐르면서 내게 맞는 약도 찾고 선생님의 적절한 처방 덕택에 약을 먹고 난 뒤 어떠한 불편함도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매일 약을 먹는 것에도 익숙해지고 약에 대한 거부감도 희미해질 때쯤 선생님은 내가 늘 마음속으로 바랐던, 하지만 아직 말로는 꺼내지 않았던 말을 먼저 꺼내셨다. 상태가 좋아졌다고 해서 혼자 단약을 하면 더 안 좋아질 수 있으니 조급해하지 말고 꾸준히 치료에 전념하라는 말이었다. 운이 좋게도 컨디션이 회복될수록 다른 어떤 것보다도 단약에 대한 갈망이 커져갔다.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단약을 감행할 생각은 없었다. 약 없이도 잘 살던 일상을 깨뜨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약을 복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거의 입원하기 전, 아프지 않았던 일상의 컨디션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도 다시 시작했었다. 앞서 말했던 약을 먹으면서 느꼈던 상실감은 사실 아프면서 먼저 겪었는데 아프기 이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실제로 선생님도, 상담을 받을 때에도 대다수가 재발로 이어진다고 했는데 나의 경우는 다행히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이전과 같은 나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첫 번째 상실감은 사라졌다.


어느 시점부터는 약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줄어든 약으로 인해 만약 불안하고 증세가 있는 것 같을 땐 다시 약을 먹어야 하며 그땐 정말 약을 평생 먹는 걸로 생각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땐 환자 입장에선 조금 상처되는 말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나는 덤덤했다. 내 기준에서는 치료의 목적을 이미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아니, 오히려 나는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과거의 나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였다. 짧은 시간이나마 내가 아닌 것 같은 나로 살아보니 하루에 한 번 약 먹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러자 약 없이 살던 일상을 그리워하지 않게 되면서 두 번째 상실감도 상쇄되었다.


어느새 약물치료는 2년 6개월이 넘도록 이어졌다. 그리고 하루치 약은 반 알이 될 때까지 줄어들었다. 이제 곧 끝이 오겠구나 막연하지만 은근한 기대를 품었다. 단약을 할 날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는 채로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익숙한 진료실의 문을 열었다. 늘 그랬듯이 선생님은 가볍게 안부를 묻고 간단한 질의응답을 하면서 상태를 확인하셨다. 그러고는 다음 진료 날짜를 잡아야 하는데 웬일인지 인사말이 길어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기다렸다가 언제 예약을 하면 될지 여쭈었다. 선생님은 그동안 고생했다며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두 달 분의 약을 처방해 주셨다.


단약은 2026년 1월부터 이루어지는 셈이다. 어쩐지 막상 날짜를 듣고 나니 싱겁기도 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물론 약을 끊은 뒤에 이상 증세가 있을 경우엔 다시 약을 먹어야 할 것이다. 그것도 평생. 하지만 그런 걱정보다도 지금까지 매일 약을 챙기고 꼬박꼬박 내원하면서 성실하게 치료를 받고자 했던 그간의 노력이 좋은 결과를 만든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딱히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지만 또 하나의 관문을 잘 넘긴 것 같은, 그래서 앞으로도 어떤 관문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씩씩하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능력치를 키운 느낌이다.


이 글을 쓰면서 여태 브런치에 썼던 글 중에 가장 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스쳐 지나갔다. 우선은 나의 후회스러운 과거와 안타까운 현재, 그리고 불안한 미래를. 더 나아가서는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상처를 받진 않을지, 반대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오해를 하지 않을지 염려되었다. 그럼에도 글을 남기는 이유는 혹여라도 치료를 망설이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이 치료받기 가장 좋은 날이라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다.


나는 이전에는 한 번도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거나 약을 처방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우울증을, 이후로 성인이 되고 나서 또 한 차례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두 번째 우울증 때라도 병원을 갔더라면 폐쇄병동에 입원까지 할 일은 없지 않았을까 후회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는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일상을 회복했고 그 시간들이 이전보다 더 나은 내가 되는 변화의 계기였다고 믿는다. 지금 이 순간도 어딘가에는 외로이 숨죽인 채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아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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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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