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국수

착각 속에 피어난 우리의 배려 _ 비빔국수

by 붕대토끼


나는 물냉면보단 비빔냉면이, 잔치국수보단 비빔국수를 좋아했다.

그는 나와 같은 메뉴를 고르지 않기를 바랐다. 양념 가득한 면발을 거침없이 먹고 나서 살얼음이 떠있는 시원한 냉면 국물 한 모금, 미지근해진 멸치 국물 한 입을 뺏어 마시면 그보다 더 완벽한 마무리는 없었다. 언제가부터 '물비빔'이라는 메뉴가 등장했다. 면발 아래 찰랑거리는 자박한 국물은 꾸덕한 양념을 잔뜩 휘감은 면발을 부드럽게 풀어 준다. 메뉴의 선택 앞에서 고민을 없애줘서 좋기도 하지만, 왜인지 어딘가 허전하다.


'가위를 안 주셨나? 무절임을 깜빡하셨나?'


- "넌 뭐 먹을래?"

- "물냉."

- "나는 비냉!"


서로가 다른 이름을 외치면, 우리의 이야기 속엔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서사가 새겨졌다. 앞접시 두 개를 건네받고선, 서로의 오랜 취향을 나누기에 바빴다. 그의 그릇 한쪽이 허전해지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입가에 웃음이 맴돌았다. 비어진 자리가 어색하지 않도록, 붉은 마음을 수북이 담아 보냈다. 테이블 주변을 감싸는 한여름의 뜨거움 속에서도, 우리의 살얼음은 오래 남았다.




어디선가 냉면이 고 나트륨 음식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싶은 듯 여름이면 자연스레 냉면집으로 향하곤 했다. 양말 밴드 자국이 문신처럼 새겨지고, 24인치 허리는 34인치가 되었다. 배에 차오르는 물과 붓는 다리는 신장과 간의 울부짖음이었다. 그 순간, 냉면이라는 단어는 내 인생에서 지워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빔냉면이 아른거렸다. 먹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배달앱을 들어가 누군가의 행복한 시간을 한 장씩 넘겼다. 괜히 장바구니에 담아 보며, 만두를 누를까 말까를 고민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배고픔과 슬픔이 뒤섞인 맛이 혀 끝에 맴돌던 찰나, 생각했다.


'비빔국수를 만들어 볼까...'




몇 달 전 선물로 받았던 소면 세트를 찬장에서 꺼냈다. 보라색, 녹색, 갈색을 띤 면발 위에 고구마, 녹차, 메밀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묘한 안도감이 들었지만 이내 아래에 적힌 밀가루라는 세 글자가 보이자 순간 멈칫했다. 일 등급 무표백 밀가루, 건면, 인공색소 무첨가라는 문장을 따라가다 먹어보자고 마음을 정했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사탕수수원당, 매실청, 현미식초, 두 배 사과식초, 한식간장, 다진 마늘, 고춧가루를 반 스푼씩 그리고 찹쌀고추장 한 스푼. 재료들을 한데 넣고 잘 섞는다. 간장, 식초, 고추장, 된장은 모두 두레생협에서 구매했다. 설탕은 가공 전 그대로인 사탕수수원당을, 소금은 미네랄이 살아 있는 인산죽염을 쓴다. 같은 음식을 먹으면 입은 몰라도 몸은 안다. 몸이 무겁고, 관절이 뻣뻣해 세수조차 버거운 날은 건강하지 않은 재료가 내 안을 스쳐간 탓이 아닐까 되짚는다. 짜지 않게 먹는 것만큼, 좋은 식재료를 고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내가 나를 아끼는 가장 단단한 방식일지도 모르기에.


100원 동전만큼 면을 꺼낸다. 촤르르 펼쳐 끓는 물에 넣고, 기다란 젓가락으로 고루 풀어준다. 삼분 간 삶다가 중불로 낮추고, 일분 간 천천히 저어준다. 불을 끄고 흐르는 찬물에 샤워를 시킨다. 보이진 않지만 분명 한층 쫄깃해졌을 거다. 넓은 흰 그릇을 꺼내, 물기를 탈탈 턴 면발을 고이 담는다. 만들어 둔 양념장을 붓고 얇게 채 썬 상추를 소복하게 얹는다. 참기름을 한 바퀴 돌리고, 통깨를 탈탈 뿌린다.


젓가락에 묻은 빨간 소스가, 너무도 오랜만이라 괜스레 마음 어딘가가 붉어져 오는 듯했다. 울컥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서둘러 젓가락질로 하얀 부분을 지워나갔다. 단맛도, 신맛도 서로 앞서지 않은 은은한 고추장 향 너머로 전해지는 맛은 오래된 허기를 달래기에 충분했다. 중간중간 느껴지는 초록잎의 아삭한 부드러움은. "천천히 꼭꼭 씹어먹어."라고 말하며, 어깨를 다독인다. 나도 모르게 어딘가 남아있던 불안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너무 많은가?' 망설이다, 한 줌 크게 집어 냄비에 넣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그에게 비빔국수가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너무 먹고 싶어서, 오늘 직접 만들어 먹었거든. 한 번 먹어봐!"

널브러진 싱크대를 정리하고, 설거지가 막 끝났을 즈음. 그는 빈 그릇을 들고 돌아왔다.


- "벌써 다 먹었어?"

- "사 먹는 거보다 맛있네!"


건강한 재료들로 만들어 맛있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괜히 더 뿌듯해졌다. 그 후에도, 맛있다는 그의 말과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 양념을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곤 했다. 그가 퇴근 후 돌아오면, 서둘러 면발을 삶아냈다.


어느 날. 가게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지나치며 나는 말했다.

- "저 국숫집 엄청 유명한가 보다."

- "응. 전에 동료들이랑 가봤어. 난 별로더라. 나 국수 안 좋아하잖아."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잠시 정적이 일었다.


"... 비빔국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서툰 음식, 부족한 맛, 조촐한 그릇 개수, 근사하지 않는 밥상.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던 음식.

그럼에도 그의 그릇은 늘 바닥을 드러냈고 그 위엔 빠짐없이 응원의 한마디가 얹혀 있었다.
숨겼다고 믿었던 내 기대감도, 그는 다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매번 응해주었다.

어쩌면, 맛있게 먹어주던 그 사람만이 아니라 맛있게 먹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하던 나 자신이 그리운 것일지 모르겠단 생각과 함께 우리의 추억은 오늘도 먹음직스럽게 비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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