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남겨진 첫 그림자
언젠가 공을 들여 '愛'를 쓰고있는 할멈에게 엄마가 물은 적이 있다.
- 근데 엄마, 그거 무슨 뜻인지 알고나 쓰는 거야?
할멈은 도끼눈을 떴다.
- 그럼!
그러더니 얇게 읊조렸다.
- 사랑.
그게 뭔데? 엄마가 짖궃게 물었다.
- 예쁨의 발견.
「 아몬드 / 손원평 」
난로의 따스한 온기가 교실의 서늘한 공기를 서서히 밀어내던 순간.
담임선생님은 출석부를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남자친구 있는 사람 손들어 봐."
'그런 걸 왜 물어보지? 손드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
절반이나 되는 아이들이 손드는 걸 보고선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여고라서 당연히 없을 줄 알았던 거다. 여중 여고를 나와 남자라곤 길에서 스쳐 지나간 사람이 전부였다. 연애를 해야겠다는 물론,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신기하게도, 대학교에 진학하자 자연스럽게 연애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CC라는 로망을 품고 강의실 문을 열었다. 학교에 어느 정도 적응했을 무렵에도 가슴을 설레게 할 친구는 좀처럼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벚꽃은 져버렸는데 연애를 향한 간절함은 좀처럼 질 줄을 몰랐다.
'소개팅 좀 시켜줘'라는 노래가 지겨워질 때쯤. 단발머리의 그녀가 답가를 불러줬다.
큰 키에 커다란 눈을 가진 스물네 살 오빠.
첫 소개팅을 앞둔 밤, '소개팅하는 법'을 천천히 두드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디를 가야 할지.
무슨 옷을 입을지.
NG로 가득한 영화 한 편을 머릿속으로 돌려보며 밤을 지새웠다. 어색한 인사를 나눈 후, 영화관으로 향했다. 맛집을 수없이 검색했었을 그의 마음을 모른 채 영화를 보러 가자고 말했다.
밥을 먹으면 체할 거 같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막막했으니까.
그저 아무 말 없이 영화를 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주말 오후.
갑작스레 나타난 SF영화는 영화관 맨 앞줄로 자리를 안내했다. 두 시간 내내 목을 젖히고, 배우의 얼굴이 아닌 커다란 자막에 집중했다.
그의 손이 언제 팝콘통에 진입할지 몰라 흘깃흘깃 눈치만 보다 빨대만 물어댔다. 허기진 배와 어색한 공기는 콜라 한 잔으로 채웠다.
버스에 올라타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과 함께 우리 사이도 조용히 흐릿해져갔다.
다시는 상영되지 않을 스무살의 첫 소개팅.
그렇게 서툴기만 했던 영화 한 편이 끝났다.
연애에 대한 마음이 점점 흐릿해져 갈 무렵.
룸메이트의 소개로 한 살 많은 오빠를 만났다. 연애를 해야겠다는 조급함이 없어서일까.
남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써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궁금해졌다.
곧 여름방학이 오면 우리 사이엔 120km의 틈이 생기지만. 설레는 마음 하나 간직한 채, 우리는 서로의 단짝이 되었다.
헤어지기 싫어 기숙사 통금 시간 직전까지 기숙사 앞 벤치에 앉아 손을 꼭 맞잡고 있곤 했다.
노란 후드티, 초록 니트, 사랑애(愛)자가 적힌 피어싱. 똑같이 맞춰입고, 똑같이 웃으며 우리는 모든 순간을 함께 했다.
영화 <노트북>으로 사랑을 배운 나는.
첫 사람이 끝 사랑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두 번의 차가운 겨울이 스쳐가는 동안에도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내 눈보다 휴대폰 화면을 더 마주치고.
집에 가면 그의 소식을 들을 길이 없고.
친구와의 약속이 더 소중해지고.
게임에는 취미가 없는 나였지만,
우리 사이엔 피시방에서의 시간만 점점 쌓여갔다.
세 번째 겨울바람이 옷깃을 스칠 때,
조심스레 그만하자고 말을 꺼냈다.
그때 그는 말했다.
"연애 초반엔 내가 너를 더 많이 좋아했었어.
그런데 네가 루푸스병이 있다는 걸 듣고 나니까,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달라졌던 것 같아."
단지 병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랑의 무게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사랑에도 조건이 필요하다는 걸.
사랑만으로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한마디가.
모든 연애에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로 남을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