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슬픔과 기쁨 사이의 유리창

by 붕대토끼


손가락이 휘어지기 시작한 후, 내 몸은 마치 물풍선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그저 부르기만 해도 왈칵 눈물이 쏟아지곤 했다. 그때의 나에게는 우는 일 말고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병원 사이사이를 떠도는 일을 멈추기로 했다. 변해버린 손가락을 되돌릴 수도, 변해가는 손가락을 막을 방법도 없어 보였다. 훗날 후회하게 될 말이란 걸 알면서도, 삼켜야만 하는 말을 내뱉어버리는 순간처럼 가슴이 먹먹해졌다. 서울에서의 취업이 어려울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본가에 내려간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아무도 없는 이 서울에서 혼자 지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울고 싶을 때 소리 내어 울 수 있다는, 그 작은 자유를 잃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일주일, 한 달, 그리고 세 달이 느리게 흘러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그들의 갈 곳 잃은 시선을 안전한 곳으로 안내하기 바빴다. 그것은 외로움을 고립감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알고 지내던 사람과의 대화마저 불편해져 갔다. 자유라는 가면을 쓴 '회피'를 끝내기로 했다.


그렇게 기차에 몸을 실었다.




본가의 작은 방이라 불리던, 내 방은 그대로였다. 엄마가 큰맘 먹고 사준 퀸사이즈의 에이스침대, 베개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곰돌이 푸인형, 창가에 매달린 노란색 커튼. 고등학생 때 모습 그대로인 방안의 풍경은 변해버리기 전의 나로 되돌려주는 마법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4시간 동안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와 고군분투하던 책상에 앉아 하염없이 책만 읽어댔다. 지금 당장 도움 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언젠가 도움이 될지도 모를 무언가를 하기 위함이었다. 해가 떠있을 땐 책을 읽었고, 달이 떠있을 땐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불안감이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날.

어릴 적 자주 가던 동네 목욕탕에 갔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덮인 매표소 귀퉁이에 '카운터 직원 모집'이라는 흰 종이가 붙어 있었다.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알았다. 이 공고를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걸. 매표소 직원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하염없이 하얀 종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렘과 불안이 뒤섞인 마음으로 다시 목욕탕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색 목욕탕 건물이 보이자 심장이 뛰었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카운터 앞으로 향했다. 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한 직원을 보자 흩어졌던 정신이 차분해졌다. 여전히 붙어있는 하얀 종이를 보자 안도감이 들었다. 혹여나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가득했던 탓이었다. 하단에 적힌 전화번호를 입으로 되뇌며 다시 문을 열고 나왔다.


침대에 걸터앉아 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했다.

'매표하는 일은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아' 작고 쉰 목소리를 몇 차례 가다듬고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매표소 구인 공고보고 연락드립니다."




한 달 10회 휴무, 오전 8시-오후 8시 근무, 월급 90만 원.

최저시급에 한참을 미치지 않는 급여에 실망감을 감출 순 없었다. 하지만 여기 말곤 잡을 곳이 없다는 걸 알았기에 출근하라는 말을 꼭 붙잡았다.


그렇게 어느덧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추석 연휴가 다가왔다.

야간 직원과 인수인계를 하는 사이에도 손님은 쉴 새 없이 들어왔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시간마저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어? 안녕, 나 누군지 알지?"

갑작스러운 인사. 아니 멀리서 걸어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동창. 이름의 마지막 글자만 달랐던, 내 앞번호였던 아이. 말을 걸을 줄을 몰랐던 탓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응, 안녕."이라 짧게 대답했다.


듣고 싶지 않아도, 궁금하지 않아도 동창들의 소식은 어디선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선생님이 됐다더라, 누군가는 공무원이 됐다더라, 누군가는 간호사가 됐다더라.'

그 친구의 근황은 들은 적 없지만, 적어도 나보다는 잘 살고 있을 거란 생각에 괜스레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활기찬 목소리를 남기고 멀어져 가는 그녀의 긴 생머리의 원피스를 바라보고 있자니 자꾸만 슬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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