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했던 삼 년 위에 덮인 하얀 위로 _ 아이스카페모카
스무 살이 된 뒤에도 아메리카노는 여전히 쓰기만 했다. 카페에서 외치는 건 언제나 초코라떼였다. 아메리카노를 무심히 손에 쥔 친구들의 모습은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나는 언제쯤 맛있어질까.' 그 순간이 어서 오기를, 나도 어서 어른이 되기를 바랐다.
동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시절.
초코시럽 위에 에스프레소를 살짝 덮고 그 위에 우유를 가득 부으며 어른이라는 세상의 문을 두드렸다. 초코의 달콤함 뒤로 은은하게 퍼지는 씁쓸함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처음 맛본 달콤 쌉싸름한 조합에 금세 매료되었다. 그렇게 카페모카라는 세계에 무사히 안착했다.
시장을 마주 본 2층 회색 건물.
어쩐지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외관을 뽐내는 카페였다. 호기심을 안고 문을 열고서 언제나처럼 카페모카를 외쳤다. 카페모카의 진가는 아이스로 먹어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카페모카의 꽃은 휘핑크림이라 할 수 있는데, 뜨거운 열기 위에선 금세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하얀 구름이 듬뿍 올라간 투명 유리컵을 들고 2층 창가자리에 앉았다. 오목하게 파인 빨대 끝으로 크림을 살포시 떠 입에 넣자, 오후의 나른함은 어느새 도망치고야 만다. 조급한 마음만큼이나 빠르게 얼음 사이사이를 휘젓는다. 빨대로 쭈욱 들이키자 시원한 달콤함이 입안에서 퍼지는 건지, 카페에서 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동안 수십 잔의 카페모카를 마주해 왔지만, 이 녀석은 단연코 내 인생 1등이다. 양이 부족해 아쉬울 일이 없는 적당히 넉넉한 양, 너무 달지 않은 초코맛과 너무 쓰지 않은 에스프레소 맛, 그리고 고된 하루를 웃게 해주는 몽글몽글한 휘핑크림까지. '제발 영원히 팔아주세요. 사장님.'하고 기도까지 하게 되는 그런 맛.
통창 너머, 하늘하늘한 하얀 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테이블을 감싸는 이 공간이 참 좋았다. 이십 대 초반.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하다 손가락이 휘어지는 장애가 생겼다. 그 일을 기점으로 본가로 내려왔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쓸쓸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모두 각자의 길을 찾아 먼 곳으로 떠났고 돌아온 건 나뿐이었다. 낯선 손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창가 테이블에 앉아 카페모카를 마셨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멈춰진 시간 속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매일을. 주말에도, 평일에도, 오전에도, 오후에도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보며, 사장님은 속으로 나를 ‘백수’라고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문을 할 때면 괜히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른 척하듯, 사장님은 언제나 정다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모카손님."이라고.
그 네 글자는 마치, 이 공간과 시간을 오래 나눈 사람이라는 명함을 건네받은 기분 같았다. 매일 와도 좋다고, 그런 너에게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 없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구한 적 없는 허락에 대한 대답 같았다.
이 공간이. 이 카페모카가. 사장님이. 그 시절의 나에게는 위로 그 자체였다.
자가면역질환에 우유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우유를 마시지 않기 시작했다. 카페모카를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건 내게 큰 좌절이 아닐 수 없었다. 카페모카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우유 대신 두유를 넣으면 어떨까?'
편의점에서 '매일두유 99.9' 190ml를 샀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손에 들고, 사장님께 건넸다. "우유 대신 이걸로 만들어주실 수 있나요?" 사장님은 당황한 기색 없이 건네받았다.
그렇게 완성된 음료의 겉모습은 익숙한 모양새였다. ‘혹시 맛이 없으면 어쩌지’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을 한 모금 삼켰다. 두유 특유의 맛이 살짝 감돌았지만, 에스프레소와 초코시럽이 그 자리를 애써 채워주는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맛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 카페모카를. 아니, 이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그리고, 감사했다. 하마터면 잃어버릴뻔한 나의 유일한 행복을 지켜냈다는 사실에.
TO. 사장님
하루 종일 앉아 있었던 날들, 괜스레 죄송한 마음이 들곤 했어요. 그런 저를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시고, 오히려 “그렇게 오래 앉아 있을 만큼 스톤을 좋아해 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생일이라고 조각 케이크를 건네주시던 일, 커피와 어울리지 않는 딸기 세 알을 내어주신 일은 따뜻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두유를 찾는 손님이 많다고 하셨지만 사실은 저 때문에 일부러 매번 사두신 것도 알고 있었어요. 스톤은 가장 외로웠던 시기에 유일하게 갈 수 있었던 곳이자, 유일하게 저를 반겨주던 공간이었습니다. 모두가 바쁘게 어딘가로 향하던 그 시절, 저는 마땅히 갈 곳이 없었고 꽤나 길었던 3년이라는 시간을 스톤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어요. 한동안 찾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들렀는데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해요. 다시 갈 곳이 없어져버린 마음에 저도 모르게 향한 발걸음 끝엔, 여전히 그 공간이. 그리고 사장님이 계셨습니다.
카페 문 닫기 4일 전, 2022년 4월 11일. 모카 손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