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작가가 되었어요~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늦은 나이에 브런치를 만나 망설임 일도 없이 글을 올리고 정확히 일주일 만에 작가 승인 메일을 받았습니다.
이 기쁨과 감사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까요.
꿈같은 현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늦었다 생각할 때가 시작할 때라는 것에 확신을 주시고
이런 기회를 주신 브런치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단발머리 중학 시절 교내 백일장에서 상을 몇 번 수상하긴 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작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습니다.
동네 동장이셨던 아버지가 8년 동안 동네 업무를 보러 다니셨고 면사무소까지는 족히 20리 길을 자전거 하나로 왕래하시면서 멀게는 5리씩 떨어져 띄엄띄엄 있는 점리, 절골, 다릿골, 추목, 평지마을 등 다섯 동네의 동장이셨던 아버지는 늘 거나하게 취한듯한 모습으로 귀가를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람을 좋아하셨고 약주를 좋아하셨던 아버지~
술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말을 인정합니다.
술 한잔 권하는 것이 친근한 인사처럼 되어있던 시절, 그래서 우리 집에는 면서기부터 면장님 군수님 등 손님이 끊이질 않았고 손님이 오셔서 자고 가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영특하셔서 소학교 다니실 때 손풍금을 상으로 받았고 무거워서 집에까지 들고 오지 못하여 학교 인근 친구 집에 두고 다니셨다는 얘기를 어머니께 들은 적 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쯤 피리를 배우느라 삐삐 거리던 어느 저녁 무렵 아버지께서는 마당에 물을 뿌려 깨끗이 비질을 하시고는 개운하신지 기분 좋은 모습으로 내가 불던 피리를 가져와 보라 하셨습니다.
사랑방 문설주에 기대어 피리를 부시는데 초등학생 어린 제 가슴이 저리도록 애절하고 구슬프면서 그 음은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심금을 울린다는 말에 딱 맞는 아름다운 피리소리였습니다.
피리로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기만 했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말씀이 없으시고 우리가 잘못하였어도 혼을 내시거나 화를 내신적이 없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 안계 실적에 부엌에서 혼내신 적은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혼난 기억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어쩌다 우리가 혼나는 걸 아시게 되면 어머니께 '뺑덕어멈도 아니면서 어찌 제자식을 그리 혼을 내느냐'라고 그러지 말라고 이르셨다는 얘기를 우리가 어른이 되어갈 즈음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지요.
나에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6남매인 우리 남매 모두에게 그러셨던 아버지를 우리는 어려서부터 어려워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혼내거나 화를 내지 않으셨음에도 우리는 아버지 앞에서 다소곳했고 조심스러워했으며 항상 예의 바르게 인사했고 세상 모든 아버지들은 당연히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난생처음 듣는 아버지의 피리소리는 청아하였고 어둠이 거뭇거뭇 내려앉는 저녁시간 때문이었는지 구슬프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웃분들이 저녁을 드시고 피리소리를 따라 우리 집으로 오셔서 "동장 어르신 피리소리는 젊은 때 들어보고 처음이라며 참 어찌 저리 잘 부시는지 시골에 계시기 아깝다고 시대를 잘 타고났으면 크게 되셨을 것"이라며 피리소리를 극찬들을 하셨었습니다.
아버지는 허허 기분 좋게 웃으시며 '참 오랜만인 것 같다 시며 모두 쉴 시간인데 시끄럽게 한 것 같다'시며 조금은 쑥스러워하시는 듯하더니 하나둘씩 모인 관중이 많아져서 일까 내친김에 하모니카를 갖고 오라셨고 오빠가 갖다 드린 하모니카를 양손을 마주하여 잡으시더니 손바닥을 폈다 오므렸다를 하시면서 반주를 넣어가면서 애절한 듯하면서도 힘이 있게 박자를 맞춰 멋들어지게 부시니, 구경꾼들에게서 모두 박수와 탄성이 터지고 한바탕 공연을 보는 듯했었습니다.
아버지는 앉아서 부니 힘이 든다시더니 하모니카를 들고 일어서서 왔다 갔다 하시면서 몇 곡을 더 부셨고 그 밤의 아버지는 처음 보는 너무 멋진 모습이었고 마치 특별 예술인의 공연과도 같았습니다.
어른 아이 모두 환호하는 가운데 '내 아버입니다'라는 뿌듯함이 있었고 내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반백년을 살면서 여태까지 아버지처럼 하모니카와 피리를 잘 다루시는 분을 본 적이 없는 듯합니다.
아버지는 글씨도 명필 중의 명필로 잘 쓰셨고 남다른 영특함과 예술적인 감각을 두루 갖추셨던 분이셨습니다.
반면 그런 아버지 곁에서 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집에 손님이 끊이질 않으니 술상에 식사대접이 거의 일상처럼 되어 있었고.
동네 업무가 우선이었고 봉사정신이 없고서야 할 수 없는 업무가 산골 동장인 것을 관리 지역이 거리가 멀다 보니 5리든 10리든 동민 누구에게 일이 생기면 가족보다 먼저 달려가셨고 밤늦게 귀가하시는 날도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정을 돌볼 시간이 부족하였기에 어머니가 땔감을 하러 산에 가시고 풀을 베서 쇠죽을 끓이시고 어머니가 할 일은 큰언니가 대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어머니를 도왔기에 그나마 가능했는지 모릅니다. 싫은 내색 한번 안 하고 묵묵히 소처럼 일만 하던 착한 큰언니가 시집을 가게 되었고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네 어른들께서 동네 업무를 할 말한 사람이 아버지뿐이라는 진심 어린 걱정들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8년 동안 하시던 동네일을 내려놓으시게 되었습니다.
한 해의 농사를 어머니랑 같이 지으시며 '이렇게 좋은걸 진작 이렇게 살 것을' 하시며 그렇게 행복해하셨고 씨 뿌려 곡식이 자라는걸 그렇듯 사랑스러워하셨다고 했습니다.
행복해하셨던 그해 가을걷이를 거의 끝냈을 즈음, 학교에 가기 전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려고 하니 문 앞에서 어머니께서 얼른 말리셨습니다.
아버지가 엊저녁부터 몸이 편찮으셔서 병원을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씀을 하시며 지금 겨우 잠이 드셨으니 그냥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셔서 인사를 하지 않고 학교로 갔습니다. 그전까지 아버지가 그렇게 심각한 상태인지를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병원만 가시면 금방 나으실 거라고 생각을 했었으나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안동병원에 갔더니 급하다고 대구 동산병원으로 모시고 가라고 했고 대구 동산병원을 가신지 일주일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고 아버지는 영구차에 실려 집으로 오셨었습니다.
간경화는 자각증세가 있으면 이미 늦은 상태라고 병원에서도 어찌 손을 쓸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고 하였습니다.
업무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보니 자연적 술자리가 많을 수밖에 없고 술을 좋아하셨으나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조용히 주무셨고 자식이 보는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이 반듯하셔서 아버지는 늘 그렇게 계셔 줄줄 알았습니다.
양볼 쪽으로 빨간 실핏줄이 보이고 안색이 붉게 변하셔서 어머니에게는 하늘 같은 서방님 셨고 건강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수수조청을 고아서 시렁 밑에 숨겨두고 아침마다 한 종지씩 드시게 하셨으며 우리에게는 아버지 약이라고 쓴 약이니 먹으면 안 된다고 단단히 이르셨으나 난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수수조청이 얼마나 달착지근 맛이 있는지를 매일 한 숟가락씩 아버지의 쓴 약을 훔쳐 먹었으니까요.
어머니께서 늘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사위들은 절대 술 못 먹는 사위를 볼 거라 하셨고 어머니의 소원대로 정말 큰 형부는 아예 술을 입에도 못 대시는 분이고 큰언니가 첫 출산을 앞두고 친정에 머무르고 있던 터라 아버지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시던 첫 손주가 태어나기 한 달 전쯤
내 아버지는 그 멋진 재능을 가지셨던 예술가 우리 아버지는 초겨울이 오는 음력 9월 자식들 먹으라고 손수 지은 농사를 추수하여 거둬 놓으시고 그렇게 황망히 떠나셨습니다.
오늘 작가 승인은 아버지가 주신 선물과도 같아 내 아버지 영전에 바칩니다.
그립습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