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의 처지에 30대 영혼이
나는 재수생도, 삼수생도 아닌 10 수생이다.
수능을 열 번 본건 아니었지만 햇수로 따지자면 그렇게 됐다.
수능으로 의대를 갔냐 하면 아니고, 기억나지도 않는 케케묵은 고등학교 시절 성적으로 수시원서를 썼기 때문에 내가 가게 된 대학은 소위 명문대는 아니었다.
친척들에게 자랑하기도 애매한 곳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래도 상관없었고 기뻤다.
기분이란 기분은 다 낸 것 같다. 셀프로 '입학을 축하합니다'라고 쓰여있는 레터링 케이크도 주문했고 초도 꽂아서 부모님과 오빠, 우리 강아지까지 불러 모아 축하파티를 했다. 내게 명문대가 아닌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입학식에 부모님도 오빠도 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난생처음 대학 입학식이었기 때문에 설레는 맘으로 지하철로 한 시간 거리를 달려 참석했다.
바닥에 놓인 화살표를 따라간 북적이는 강당엔 커다란 대형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는데 입학생을 과별로 줄을 세우는 중이었다.
나는 늦게 참석하는 바람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선에 멀리 떨어진 강당 끝 줄에서 꽃을 들고 있는 다른 부모님들과 함께 까치발로 입학식을 바라봤다. 끼지 못하고 있는 게 마치 어정쩡한 내 위치 같기도 해서 조금 맘이 싱숭생숭했던 거 같다.
입학식 후 며칠이 지났을까 OT 참석 문자가 날아왔다. 이 나이에 가는 게 주책 아닐까 전날까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참석했다.
인생에 한 번뿐인 경험을 못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망의 OT날, 숨죽이고 들어간 작은 강의실에 과 학생 중 참여한 몇 명의 어린 친구들이 앉아있었다.
고등학교 개학 느낌을 살려 눈치를 보며 적당히 빈 곳에 앉았다.
친화력을 발휘해 보겠다고 몇몇과 말을 터서 밥을 먹으러 갔는데, 그때서야 내 나이를 말할 차례가 되었다.
조금 뻘쭘했지만 당당하게 얘기하고 언니 칭호를 얻었다.
식사 중인 동생들을 보고 고민하다가 만류하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모든 밥값을 계산했다.
나도 사실 돈이 없었지만 그때는 나잇값을 하고 싶었던 거 같다.
요즘 애들
대학에 오기 전에 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인스타 계정 개설이다.
왜냐하면 요즘 애들은 카톡이나 전화번호를 주고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저스트 가벼운 친목 정도? 전화번호는 좀 딥하고 인스타 아이디 정도만 '어 너랑 친구 해볼까?' 하는 느낌으로.
타 과까지 섞여서 모여있는 애들이 이 무리 저무리를 오가며 아이디를 수집해 가기 시작했다. 나는 창피하게도 친구도 없고 계정도 없어서 급하게 만든지라 팔로워 0의 계정을 보여주며 맞팔을 했다.
그 친구들이 지금 계속 맞팔이냐고 물어보면 아니다 하하
심지어 같은 과인데도 언팔을 한 친구도 있고... 맞팔이지만 내 계정은 사실상 '아직 정상영업 합니다' 꺼져가는 네온 간판만 켜놓은 상태랄까...
인플루언서 같이 요즘말로 '개 말라'에 힙한 옷들을 입은 친구들의 인스타 게시물을 보면 그 친구들이 내 게시물을 볼 때 느낌은 마치 계곡에 능이백숙 먹으러 가서 찍은 인증샷 느낌이 될 것 같아서 올리기가 참 뭐 하더라.
나도 처음엔 정말 아무렇지 않았는데 스무 살짜리 어린애들과 며칠 지내보니 내 나이를 소개할 때면 진짜 곤란해졌다. 내 나이를 듣고는 헉! 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어떤 교수님은 "자네 나랑 비슷한 연배 아닌가" 라며 껄껄 웃으셨다...
다행히 나는 친화력이 좋은 편이었고 의욕도 있어서 나도 어찌어찌 무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끼리 뭉치고 친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술자리에 불려 가는 경우도 없었고 사석에서 만나자 하면 감사한 일이었다.
게다가 요즘 애들은 정말 젠-지(Zen G)해서
내가 학습하기에는 정말 힘든 것들이 많았다.
아이돌 얘기라면 그나마 건전하고 다행이랄까, 이성얘기와 욕설, 고막이 터질 거 같은 수다와 시도 때도 없이 펼쳐지는 무료 케이팝 공연에는 정말 어정쩡하게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나이 많은 신입
나이를 먹으면 필수적으로 겪는 통과의례가 있는 듯하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과의 관계다. 그중에서도 최악의 관계는 '나이 많은 신입'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내가 과대를 하게 된 적이 있다.
(자원 한건 아니었는데 정말 100% 타의에 하게 됐다.)
과대는 정말로 많은 일을 했는데 수많은 대학 만화에서 왜 과대를 멋있게 표현했는가 에 대한 의문이 넘쳐났다. 작가는 대학교를 안 나와본 것인가... 적어도 내가 경험한 과대는 정말 최악이었다.
쉬는 시간도 없고 방학에도 무급으로 학교 일을 했어야 했으며 심지어 시험기간에도 남아야 했고 주마다 이어지는 회의와 쥐 잡듯 잡아대는 조교와의 미묘한 관계... 정말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한편, 조교들은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다.
내 기를 죽이고 싶었는지, 만만히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초면부터 반말을 했으며 여느 신입생들에게 하듯이 쥐 잡듯 일처리에 딴지를 걸었다.
신입생의 처지에 갇힌 30대의 영혼은 정말로 힘겨운 나날이었다...
한 술 더 떠서 학생회라는 조직은 나를(신입생들을) 무급으로 부려먹으려고 했다.
방학에 나와서 9to6로 일을 하라는데, 네...?
정말 다행인 것은 내가 바보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방학 중 근로를 피해 갈 수는 없었지만 학교 측에 얘기해서 근로장학금을 받아냈다.
학생회 신입생 모두 내 덕에 장학금을 받았지만 아마 아는 사람은 없을 거다.. 하하..
뒤에선 누가 내 욕을 했다던데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이십 대에 얻은 교훈이 있다면 돈 없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교훈이었다.
과탑을 향해
갓 입학했을 때 첫 강의와 여러 강의들을 회상해 보면 헤르미온느처럼 어떤 질문에도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아는 내용이면 신나게, 모르는 내용이어도 피드백으로 얻어가는 게 있을 테니까.
소위 좀 나댔다. 덕분에 과동기들 사이에선 저 언니 공부 정말 열심히 한다며 성실하다는 칭호를 얻었다. 교수님의 예쁨도 조금 얻었다.
사실 공부할 때 나잇값을 하려는 강박 때문에 강의를 정말 열심히 들었다.
이 기회가 소중했고 무엇보다 재밌었다.
아마 이 나이에 대학을 가야만 느낄 수 있는 소중함이랄까.
교수님이 평생교육대학원 수강생들이 그렇게 열의가 넘친다고 하셨는데 내 얘기 같아서 깊이 공감했다.
나이 먹은 자만이 알고 있는 시간과 기회의 소중함이다.
공부에 요령은 없었지만 새벽 카공을 하며 열심히 공부를 했다.
모르는 건 교수님을 잡고 질문했고, 팀플은 내가 조장을 맡아 열심히 할 수 있었다.
요즘에는 자기 말로 글 쓰는 게 그렇게 어렵다고 하던데 챗GPT를 쓰며 머리를 쥐어짜는 동기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레포트를 신나게 휘갈겼다. 일필휘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대망의 첫 시험. 생각보다는 실망스러웠지만 어찌 됐든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과탑은 못했지만 과에서 10등 안에는 든 거 같다.
그 후에는 요령이 생겨서 줄줄이 낙방하는 동기들을 뒤로하고 논술과도 같은 시험에서 만점을 받기도 하고, 공부를 가르쳐달라는 동기에게 과외를 해준 적도 있었다. 다음 학기에는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열심히 사는 게 요즘은 흠이라는데, 능력주의 사회에서 나도 꽤나 요령 없는 처세였지만 열심히 살면 그래도 다들 좋게 봐준 것 같다. 어려워하던 동기들도 언니언니 하면서 따라왔고, 상담도 해주고 좋은 언니라는 꼬리표가 따라와 줬다.
나의 시간
30대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며 느낀 것은 '나이는 깡패'라는 요즘 교훈이다.
지난 몇 년간 열심히 살아냈지만, 10년이나 늦은 삶은 녹록지 않다.
남들과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하고,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추억을 쌓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30대에 대학을 가지 않았다면, 그저 인생이 평탄했다면 얻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소중함이다. 나 역시 그랬듯 시간과 기회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았다.
인생에 필요한 건 큰 욕심과 포부 같았고 빛나는 결승선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남들같이 살기를 원하며.
그렇지만 30대에 새로운 시작을 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을 스쳐 지나갔다.
갓 고등학교에서 올라온 스무 살 친구들, 나만큼은 아니지만 뒤늦게 대학에 온 반가운 동생들, 나와 열 살 차이는 날까 싶은 많은 걸 이룬 젊은 교수님, 지식이 깊은 나이 지긋한 교수님, 모임에서 가끔 만나는 표준의 30대들...
나와 다른 시간을 살고 있지만 그들은 나의 시간에 존재했다.
서로의 삶을 주고받지만 각자의 시간을 이어나간다.
보통의 삶을 살았다면 아마 나의 시간이 얼마나 고유한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늦었기에 특별하고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한다.
요즘 유행하는 인생 회귀의 주인공이 나일지도 모르겠다.
30대의 영혼으로 20대의 삶을 새로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40대가 30대를 보면 어리다고 하겠고, 80대가 70대를 보면 청춘이라 하겠다.
지난한 계절이 지나고, 살갗에 여름이 느껴지던 그해, 시작된 청춘은 각자 다른 시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