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좌절의 그 중간쯤
간간히 학원 동료들의 출연 소식들이 전해졌다. 기업 사내 방송 에피소드에 출연하기도 했고, 공공장소에 의례 나오는 안전교육 영상에 출연한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흰 수염이 멋진 신사분은 화보모델로 방향을 틀어서 약진했다. 부러웠다. 나는 안되나 보다 하는 생각에 좌절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한건이 안 잡힐까. 한탄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본 게 어디야라는 만족감만은 대단했다. 상상만 하고 행동하지 않은 것과 해보고 안 되는 것은 다르니 최소한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묘비명은 쓰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이제는 동화책 읽어 주는 아빠보다 아이패드를 더 좋아했기에 나는 비로소 동화 속 대사 대신 각종 드라마 대사를 연습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에는 대본이 넘쳐 났다. 좋아하는 드라마 대사를 다운로드하여 출퇴근 길 차 안에서 내 맘대로 연습했다. 내 맘대로라는 것은 다양하게 내 맘대로의 인물설정을 바탕으로 대사 했다는 뜻인데 예를 들어 멜로드라마 속 20대 청춘 남주의 대사를 40대 아저씨로 바꿔 그 감정으로 대사 하는 재미가 있었다 (합법적 감정이입의 대리 만족이랄까) 또 알고는 있으나 본 적이 없는 드라마 대본의 경우 본 적이 없으니 선입견 없이 내 맘대로 대사 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후 유튜브에서 배우 남궁민이 과거 무명시절 본 적 없는 작품의 대본을 자신 만의 해석으로 연습했다는 인터뷰를 보고 어려울 때 사람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하구나 안도했다.
유튜브는 그 시절뿐 아니라 지금도 참 좋은 선생님이자 참고서가 되어주었다. 배우 이전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지적 만족감을 위해 영화 평론 콘텐츠를 많이 봤었는데 그중 영화 평론가 이동진님의 컨텐츠는 꼼꼼히 본다. 영화 평론가의 채널인 만큼 영화에 대한 해설이 주이지만 영화의 이론적 테크닉에 대한 주제도 많기 때문에 코로나 시절 학생들 온라인 수업하듯 정색하고 시청한다. 예를 들어 이창동 감독의 '시'를 소개하며 '몽타주'와 '미장센'을 설명한 콘텐츠는 배우 이전의 영화팬으로서 좀 안다고 생각했던 내게 다시금 명확히 공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이 아니라 이 채널에는 기라성 같은 배우들의 출연이 많은데. 대배우의 성장기, 연기 철학 등을 듣고 배울 수 있었다. 감독이 출연한 경우 더 흥미롭다. 감독이 배우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배우를 좋아하는지, 나아가 영화를 만들며 어떤 고민을 하는지 등 배울 것이 산처럼 많았다. 실적 하나 없는 배우(지망생)에게 현실과 동떨어진 별나라 얘기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직장 생활 9단 경력자로서 윗사람 속내 알고 일하는, 지 할 일 다 했다고 남처럼 구는 MZ와는 차원이 다른 X세대의 충성심을 보여주겠어 다짐했다. 배우로서 영화에 관한 그 어떤 콘텐츠도 버릴 것이 없었다. 미술과 조명, 상징의 맥락을 배우가 몰라도 될 순 있다. 하지만 나는 아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퇴근길 꽉 막힌 사거리 차 안에서 나 홀로 지적인 배우였다.
회사 일 때문에 머리가 아플 땐 '유퀴즈' 같은 토크 프로그램에 배우가 나온 편은 꼭 찾아봤다. 특이하게 생각하는 점은 다른 분야 게스트들이 나왔을 때와 다르게 유달리 배우가 나왔을 때는 어려웠던 무명시절의 얘기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좋은 동기 부여가 된다. 진선규 배우의 쌀 꾸러 다닌 얘기, 이성민 배우의 단칸방 모기와의 사투, 커피 믹스로 끼니 해결 했던 얘기 등 어려웠던 시절에도 배우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은 의지가 힘이 되었다. 그래도 내게는 직장 경력으로 만들어 놓은 재물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안도했다. 그러나 백미러에 슬쩍 비치는 주름 낀 40대 아저씨의 얼굴에 그 안도도 부질없다.
유튜브를 연기공부 용으로 쓰다 보니 알고리즘이 일타 강사 수준이다. 참 좋은 정보를 알아서 척척 내놓았는데 어느 날은 할리우드 명 배우들의 연기 철학 인터뷰 영상 모음이었다. 여기서 알파치노 배우는 너그러운 미소로 이렇게 얘기했다.
‘너에게 많은 걸 요구하는 배역이 너를 발전시키는 거야. 너의 지평선 또는 사고를 넓혀주지’
'정말 명언이세요 형님. 저도 어려워도 척척 해낼 테니 그러니까 일 좀 시켜주세요'
책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대형 서점에서 연기, 배우로 검색하시면 읽어야 할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연기 전공도 아니고 학원은 실습 위주였던 터라 유튜브의 단편적 정보가 아닌 체계적인 지식을 쌓고 싶었다. 쉽게 말해 콤플렉스였다. 그런데 연기 이론 관련 책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최신의 업데이트가 많은 분야가 아니라는 것에 놀랐다. 100년이 지난 명사의 이론과 훈련법등이 아직도 메인이었다. '무대 에튜드 - 배우를 위한 연기 지침서', '미하힐 체홉의 배우수업'등이 그랬다. '매소드 연기'란 키워드에는 그 말의 명성처럼 많은 책이 쏟아졌다. 약간 겁이 났지만 일단 읽고 볼일이었는데 나름 술술 읽히는 것도 신기했다. 미국 사람들 표현처럼 'Rocket Science'나 'Brain Surgery'는 아닌 것이었다. 그래서 보이는 대로 잡아 읽었다.. 아이들과 주말에 간 동네 작은 구립 도서관에도 연기, 배우 관련 책들이 여러 권 있다는 것에 놀라웠는데 박찬욱 감독이 <공동경비구역 JSA>끝내고 인터뷰와 기고문을 엮어 낸 '박찬욱의 몽타쥬'란 20년 넘은 책을 먼지 털어 읽기도 했다. 초보배우에게 읽지 않아도 될 책은 없었다.
오래된 책이지만 ‘대중 연기의 미학’도 좋았다. 영화 베트맨의 집사로 유명한 마이클 케인이 지은 '마이클케인의 연기수업'은 그의 인상처럼 자상하고 친절했다. 한 구절 소개하면 이렇다.
'카메라 앞에 처음 서는 일은 첫 데이트를 하러 나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첫인상을 특별히 좋게 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카메라에게 구애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카메라는 당신을 깊이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지극 정성을 바치는 애인처럼 카메라는 당신의 모든 말, 모든 시선을 좇을 것입니다. 카메라라는 애인은 당신에게서 결코 시선을 떼지 못한답니다. 카메라는 당신의 말과 행동을 모두 듣고 기록할 것입니다. 아무리 미세한 움직임일지라도 말이죠'
지금이야 저 말의 뜻을 경험으로 알지만 당시엔 대학가서 연애하면 벌어질 일을 갓 대학 간 동네 형들한테 들으며 설렘과 부러움에 몸이 달아오른 빡빡머리 고등학생의 심정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