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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Jun 22. 2020

전쟁서는 무용지물… 정치범 감옥으로 악명

<51> 러시아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1703년 표트르 대제 의해 건설
스웨덴 군의 요새 장악 시도 실패 

북방전쟁 중 전투에 쓰이지 못해 

 
1917년까지 정치범 감옥으로 사용
소비에트 정부가 박물관으로 개조
요새 내 성당에 러시아 차르들 안장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전경. 사진=www.myguidestpetersburg.com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850㎞ 떨어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제2의 도시이다. ‘북방의 베네치아’, ‘제2의 암스테르담’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101개의 섬과 400여 개의 다리로 연결돼 있다.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 벌인 북방전쟁(1700~1721) 중인 1703년 네바 강변에 위치한 토끼섬에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Petropavlovskaya Fortress)를 세운 것이 이 도시의 기원이다.


요새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스웨덴이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진출하지 못해 실전에 쓰이지 않았다. 대신 이곳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는 1917년까지 수비대의 주둔지 겸 정치범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사용됐다. 요새 안에 있는 성당에는 표트르 대제부터 니콜라이 2세까지 러시아의 모든 차르(슬라브계 여러 국가의 군주 칭호)들이 안장돼 있다.

1717년 프랑스의 화가 장 마르크 나티에르가 그린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에서 가장 칭송받는 황제 중의 한 명이다. 사진=베르사유 궁전 홈페이지


버려진 땅이었던 황량한 늪지대 네바 강변

17세기까지 유럽의 변방이었던 러시아는 스웨덴과 발트해 연안 지방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북방전쟁(1700∼1721)에서 승리하면서 강대국으로 올라서게 된다. 당시 스웨덴은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종교개혁과 30년 전쟁(1618~1648)으로 내홍(내부에서 저희끼리 일으키는 분쟁)을 겪는 동안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해 최강국으로 부상해 있었다.

러시아는 1700년 나르바 전투에서 완패했지만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승리해 주도권을 잡은 이후 1714년 항코 반도에서 스웨덴 함대를 격파하면서 발트해 제해권(평시나 전시를 막론하고 무력으로 바다를 지배하여 군사·통상·항해 따위에 관해 해상에서 가지는 권력)을 장악했다.

그 후 1718년 카를 12세(1682~1718)가 노르웨이의 할렌에서 유탄에 맞아 전사함으로써 왕을 잃고 전의를 상실한 스웨덴이 1721년 핀란드에서 러시아와 니스타드 조약을 체결, 전쟁은 종결됐다. 스웨덴은 17세기에 획득한 발트해의 영토를 대부분 상실했으며, 이는 대부분 러시아의 차지가 됐다.

러시아를 승리로 이끈 주역은 로마노프 왕조 제4대 차르인 표트르 1세(1672~1725)이다. 그는 북방전쟁 초기에 스웨덴으로부터 옛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춥고 황량한 늪지대인 네바 강변을 빼앗았다. 습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었던 이곳에 1703년 5월 16일(당시 율리우스력을 사용했던 러시아 일자로 현재는 5월 27일) 스웨덴의 침입을 막고 유럽을 향한 전초기지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건설하면서 도시가 형성됐다. 그해 가을에 나무와 흙으로 된 요새가 축성됐는데, 120개가 넘는 대포가 세워졌다.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전경. 사진=ttnotes.com

요새 중심의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도시 건설에는 수만 명의 농노와 스웨덴 전쟁 포로들이 동원됐다. 9년간의 대역사 끝에 1712년 도시가 완공되면서 표트르 대제는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도시는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의미의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라고 명명됐다. 세인트(Saint)의 러시아식 발음인 상트는 라틴어로 ‘성자’, 페테르(Peter)는 네덜란드어로 ‘베드로’, 부르크(Burg)는 독일어로 ‘도시’를 뜻한다.

1705년 스웨덴 군이 요새를 장악하려고 하자, 이를 저지한 후에 이곳은 1706년부터 1740년까지 석조로 강화됐다. 요새를 둘러싼 벽은 높이 12m, 두께 2.5~4m로 지어졌으며 5개의 성문과 6개의 망루가 설치됐다. 하지만 이후 북방전쟁이 끝날 때까지 스웨덴 군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한 번도 발을 딛지 못해 요새는 전투에 쓰이지 못했다. 요새 중심에 솟아 있는 건축물은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와 바울을 기념하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으로 1712년부터 1733년까지 건설했다. 첨탑 높이는 122.5m이고, 꼭대기에 있는 황금빛 천사상의 무게는 550㎏에 달한다. 1780년 예카테리나 여제 시대에 요새는 화강암으로 덧씌워졌다.


감옥으로 쓰였던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내부 모습. 사진=samytrip.com


소설가 도스토옙스키 등 수감

실전에 쓰인 적이 없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는 수비군의 주둔지가 됐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정치범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러시아에서 가장 두려운 교도소 중 하나로 악명을 얻었다.

최초의 수감자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에 반대한 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1690~1718)였다. 1718년 3월 왕가의 권력 다툼 와중에 반역죄로 붙잡힌 알렉세이는 고문을 견디지 못해 숨진 후 성당 입구 계단 아래 묻혀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이 밟고 지나가게 됐다.


1872년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그는 1849년 12월 시베리아로 유형 가기 전에 8개월간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수감됐다. 사진=트레티야코프 미술관


1825년 12월에 젊은 귀족과 청년 장교들이 러시아의 전제정치와 농노제(농민이 봉건 지주에게 예속돼 지주의 땅을 경작하고 부역과 공납의 의무를 지녔던 사회 제도)에 항거해 봉기했다가 이곳에 갇혔다. 소설가 도스토옙스키와 막심 고리키, 혁명가 트로츠키와 레닌의 형인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 등이 이곳에 수감됐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파블롭스키 연대의 반란군 병사들이 이곳을 공격해 감옥에 있던 포로들은 풀려났다. 그해 10월 혁명이 일어난 후에 요새는 분노한 대중들로부터 황제 측근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됐다가 결국에는 볼셰비키에 의해 점령당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1924년 요새를 박물관으로 개조했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독소전쟁(1941~1945) 때 도시를 포위하고 있던 독일군의 공중전 부대인 루프트바페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가 전후에 복구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매년 도시의 날인 5월 27일에 도시가 탄생한 요새를 중심으로 기념행사를 연다. 전쟁은 끝났지만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는 오늘도 유유히 흐르는 네바 강변을 지키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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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국방일보 2020년 6월 22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200622/2/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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