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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Jun 30. 2020

600년 흥망의 역사 지켜보며 중국 권력의 상징으로

<52> 중국의 자금성

15세기 명나라 영락제가 건설한 황궁
세계 최대규모…명·청 24명 황제 살아
아편전쟁 등 위기…문화재 약탈 등 수모
1925년 고궁박물관으로 일반인에 개방

                                                        

자금성 전경. 사진=www.travelchinaguide.com


중국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은 15세기에 지어진 목재 건축물로 중국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1420년 명나라의 영락제가 건설한 황궁으로, 명(明)·청(淸) 시대 24명의 황제가 살았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城)으로 길이는 동서로 753m, 남북으로 961m, 넓이는 72만㎡(21만7800평)에 달한다. 800여 채의 건물과 8886개의 방이 있으며 10m에 이르는 높은 성벽과 50m 너비에 6m 깊이를 가진 거대한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가 주위를 감싸고 있다. 자금성은 수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위기를 겪었다. 제2차 아편전쟁(1856~1860) 때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주요 문화재가 약탈됐으며, 중·일전쟁(1937~1945) 전에 일본의 문화재 수탈을 피하기 위해 문화재를 피난 보냈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고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간에 벌인 국공내전 중에 장제스의 지시로 일부 유물이 대만의 타이베이로 유출됐다.


작가 미상의 화가가 그린 영락제의 초상화. 현재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영락제는 자금성에 거주한 첫 번째 황제이다. 사진=싱가포르 국립대 홈페이지


중국 베이징에 지어진 목조 건축물


13세기 말 북방 몽골족인 원나라가 송나라를 쓰러트리고 몽골고원의 카라코람에서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겼다. 1368년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1328~1398, 홍무제)은 난징을 수도로 정했다. 주원장의 아들이자 태자인 주표는 38살로 요절했기 때문에 황제 자리는 주표의 아들인 주윤문(1377~1402, 건문제)이 이어받았다. 1398년 주원장이 71살로 세상을 떠나자 22세의 주윤문이 2대 황제로 즉위한다. 그러나 주원장의 넷째 아들이자 베이징 지역을 다스리는 연왕(燕王)인 주체(1360~1424, 영락제)가 1399년 정난의 변(1399~1402)을 일으켜 자신의 조카인 주윤문을 즉위 4년 만에 폐위시키고 제3대 황제인 영락제로 즉위한다.


영락제는 1406년 난징에서 자신의 세력 기반이 있는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면서 새로운 황궁을 짓도록 한다. 건설에 1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는 등 중국 건축물 역사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자금성은 원나라 시대 황궁 자리에 1420년 완공됐다. 이듬해 영락제는 베이징으로 천도했다. 성 내부는 정무 처리를 위한 구역인 외조(外朝)와 황제의 주거 구역인 내정(內廷)으로 구분됐다.


자금성 전경. 사진=www.pinterest.nz


제2차 아편전쟁 英·佛 연합군에 점령 당해


명나라 말기인 1630년대 이자성(명을 멸망시킨 농민반란군의 지도자)이 주도한 농민봉기로 인해 1644년 4월 자금성이 함락되면서 명나라는 마지막 황제 숭정제(1611~1644)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자성의 군대는 명나라 장수 오삼계와 청나라 군대의 반격에 자금성을 점령한 지 42일 만에 퇴각하면서 성의 일부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국의 패권을 잡으며 왕조는 교체됐지만, 자금성은 계속 황제들의 거처가 됐다.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룩한 건륭제(1711~1799) 시대에 자금성은 황금빛 유리 기와로 전면 교체됐다.


하지만 자금성의 영광은 길지 못했다. 1세기도 안돼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잠자는 용에서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아편전쟁은 영국이 차 수입으로 발생한 무역적자를 아편 밀수출로 만회하려는 야욕에서 비롯됐다. 청나라가 영국과 벌인 제1차 아편전쟁(1839~1842),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를 상대한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으로 구분된다.


베이징에는 자금성과 함께 1707년 강희제(1654~1722)가 지은 황실 정원인 원명원이 있었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1860년 이곳을 침탈한 이후 보물을 약탈하고 불태운 후, 자금성을 점령했다. 중국의 상징인 자금성마저 불탈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함풍제(1831~1861)가 1860년 10월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은 종료됐다.


천안문 전경. 사진=www.britannica.com

‘자주색의 금지된 성’이란 뜻


자금성의 위기는 계속됐다. 1900년 8월 의화단 사건(중국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외세 배척 운동)으로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해 자금성에 주둔하면서 1년 동안 유물들을 또 약탈해 갔다. 1911년 쑨원이 주도한 신해혁명(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청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듬해인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침략을 본격화하자, 1933년 중화민국은 일본에 문화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금성을 비롯한 베이징에 있는 유물을 1만9000 상자에 포장해 상하이와 난징, 쓰촨 등지로 운반했다. 이 중 1만3000 상자가 자금성 유물이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에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과 장제스가 지휘하는 국민당 간에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1948년 12월 장제스의 지시로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에 있던 유물들이 대만의 타이베이로 옮겨졌다. 이 유물들은 현재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자주색의 금지된 성’이란 뜻으로 황제에게 허락된 이들만 들어오거나 나갈 수 있던 자금성(紫禁城)은 1925년 중화민국 정부가 고궁박물원으로 변경하면서 일반에 개방됐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했다. 이를 상징하듯 천안문에는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자금성은 180만 점 이상의 문화재를 전시·소장하고 있으며,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2012년부터 매년 1500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올해로 600년을 맞은 자금성은 명실상부한 중국의 국력을 상징한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20년 6월 29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200629/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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