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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Jan 23. 2020

로마인이 이 門을 지나자 유대인 디아스포라 시작됐다

<11> 이탈리아의 티투스 개선문

1차 유대전쟁 승리 이끈 황제 티투스 기념해 건축
‘통곡의 벽’만 남겨둔 채 로마군 예루살렘 성전 파괴


티투스 개선문. 사진=픽사베이


티투스 개선문은 로마제국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이전 황제이자 그의 친형이었던 티투스의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82년에 세운 가장 오래된 개선문이다. 이 개선문은 프랑스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을 포함해 많은 개선문의 모태가 됐다.


전쟁사는 승자와 패자의 역사다. 그중에서도 티투스 개선문은 이를 가장 명확히 보여준다. 전쟁에 승리한 로마제국에는 티투스 개선문이 영광이지만, 패배한 유대인들에게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며 전리품을 나르는 장면이 부조로 생생히 묘사돼 있는데 티투스 개선문은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박해의 상징이었다.


덴마크 코페하겐에 있는 글립토테크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작가 미상의 80년 제작된 티투스 황제의 흉상. 사진=www.ancient.eu


티투스 개선문의 티투스, 그는 누구인가?

티투스  개선문의 주인공 티투스, 사실 이는 로마 황제의 이름이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39~81)의 약자로 ‘티투스’라 부르는 역사 속 인물은 39년 플라비우스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난 로마의  11번째 황제다.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는 후에 플라비우스 왕가의 초대 황제가 되는 집정관 출신의 장군이었는데 황궁에서 자란  티투스는 아버지를 따라 로마군의 장교로 성장했고 61~63년 군사호민관으로 아버지와 함께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에서 복무했다.


66년 시작된 제1차 유대-로마 전쟁

1세기 초에 로마제국은 브리튼과 갈리아부터 이집트까지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다스렸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변방에 있는 유대 지방(로마제국에서 296년 사두 정치 체제 이전까지 본국 이탈리아 바깥의 가장 큰 행정 단위)들과 종교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66년 로마에서 임명한 유대의 총독인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바쳐진 헌금까지 착복하는 일이 벌어지자 유대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게시우스가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결국 걷잡을 수 없는 폭동으로 번졌다. 이 여파는 다른 지방으로 확대됐고 유대를 관할하는 시리아 지방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로마 군대를 이끌고 직접 군사행동에 나섰지만, 반란군의 기습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네로 황제는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을 우려해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진압을 지시했으며 67년 티투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하지만 68년 네로 황제가 사망하면서 전쟁은 잠시 중단됐다. 네로 사후 1년 사이에 로마에는 4명의 황제가 등극하지만, 취임 후 곧 제거되는 정변 사태가 됐다. 


개선문 다른 내벽의 사후 새로운 신이 된 티투스 황제가 천상의 전차를 타고 승리의 여신이 씌워 준 왕관을 쓴 채 승리에 찬 당당한 모습으로 행진하는 모습. 사진=픽사베이


70년 로마군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70년 6월 티투스는 로마군에게 유대 지역의 나무들을 베어 예루살렘 성전 둘레에 뾰족한 말뚝으로 7㎞에 달하는 벽을 세워서 유대인들을 탄압하라고 지시한다. 그해 9월 예루살렘은 넉 달 동안 계속된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함락됐고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 군단은 예루살렘 성벽을 허물고 성 내로 들어가 유대인들을 살육했다.


그렇게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됐다. 로마군은 성전의 서쪽 담장 하나만 남겨뒀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통곡의 벽’(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이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서쪽의 마사다 요새에서 끝까지 항전했으나, 73년 함락되면서 1차 유대 전쟁은 막을 내렸다.

79년 6월 24일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타계하자 39세의 티투스가 즉위했다. 로마제국 역사상 아버지의 황위를 아들이 물려받은 것은 티투스가 최초였다. 그의 재위 기간 아버지가 해오던 로마인들의 투기장인 콜로세움이 완공되는 영광도 있었지만, 여러 재앙이 더 많았다.


황제가 된 지 불과 두 달 만인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폐허가 됐으며 80년 초 로마의 중심부에 4일간 대화재가 발생해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81년 여름에는 로마에 유례없는 전염병이 돌았고 그해 9월 13일 티투스는 황제가 된 지 2년 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병에 걸려 41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이를 두고 유대인들은 그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했다.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 유대교를 상징하는 7개의 가지가 있는 촛대 메노라, 유대교의 황금 나팔, 진설병을 얹어놓는 탁자 등을 옮기는 장면. 사진=픽사베이


유대교 상징 메노라 약탈 장면 개선문 조각으로 새겨

이어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제위에 올랐고 로마 공화정의 중심거리인 비아 사크라(Via Sacra, 신성한 길)의 가장 높은 지점인 벨리아 언덕 정상부에 82년 티투스 개선문을 세웠다. 티투스 개선문은 높이 15.4m, 폭 13.5m, 두께 4.75m로 아치 안쪽 벽은 격자형으로 장식돼 있는데 내벽에는 로마군의 전쟁 장면과 쌍두마차를 타고 개선하는 티투스의 모습이 조각돼 있다.

티투스 개선문은 18세기까지 한 가문의 저택 망루로 사용되다가 19세기 교황 비오 7세의 지시하에 1822년 도시계획가 주제페 발라디에르가 복원해 지금의 모습이 됐다. 티투스 개선문은 로마제국의 2000년 가까운 영광과 유대인의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건축물이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인해 유대인들은 고향을 떠나 세계로 떠돌기 시작한 디아스포라(Diaspora)를 2000년 가까이 했다. 티투스 개선문으로 전쟁 역사에 뚜렷이 남은 티투스 황제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없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20세기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도 없지 않았을까? 가정은 무의미하기에 오늘날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며 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의 평화를 바랄 뿐이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19년 9월 9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0909/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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